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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초나무, 초피나무, 옛날 우리 향신료들

  • 입력 2023.11.14 14:35
  • 기자명 신종찬(시인,수필가, 의학박사 / 신동아의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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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엠디저널] 산 중턱에서부터 생강나무 같은 관목 잎들이 노랗게 물들기 시작한다. 가을인데도 잎들이 유독 초록빛으로 반짝거리는 나무가 있다. 빨간 가지 끝에는 팥알만 한 열매의 갈색 껍질들이 벌어져 있고 그 안에는 검은 열매들이 반짝반짝 빛난다. 그 곁에 어린나무들도 더러 자란다. 서울 근교 야산에서 흔히 볼 수 있지만 무척 귀한 산초나무들이다. 임진왜란(1592년) 후에 이 땅에 고추가 들어오기 전에는 매운맛으로 우리 식탁을 풍성하게 해주었지만, 지금은 밀려나 겨우 명맥만 유지하고 있다.

산초나무는 한국, 중국, 일본 등 동북아가 원산지다. 우리나라에 자생하는 운향과(귤과) 식물들은 산초나무, 초피나무, 쉬나무, 탱자나무, 유자나무 등이 있다. 산초나무와 초피나무는 식용이고 쉬나무는 씨로 기름을 짜서 불을 밝히는 데 쓰인다. 열대나 아열대가 원산인 운향과 식물 조상이 온대지방으로 터전을 확대하면서 적응하여 산초나무와 초피나무로 진화했다고 볼 수 있다. 즉 우리나라 산천에 자생하는 온대지방 귤나무 의 일종이다. 예부터 산초나무는 고대 중국에서도 『시경(詩經)』 당풍편(唐風編) 「초료(椒聊)」에 아주 귀한 대접을 받았다.

산초나무 열매, 무성하여 됫박 가득 땄어요

(椒聊之實 蕃衍盈升, 초료지실 번연영승).

저기 그분은, 강대하여 적수가 없다네

(彼其之子 碩大無朋. 피기지자 석대무붕).

산초나무는, 멀리도 가지를 뻗었다네

(椒聊且 遠條且. 초료차 원조차).

산초나무 열매, 두 손에 가득 땄어요

(椒聊之實 蕃衍盈匊. 초료지실 번연영국).

저기 그분은, 위대하고도 독실하시네

(彼其之子 碩大且篤. 피기지자, 석대차독).

산초나무는, 멀리도 가지를 뻗었다네

(椒聊且 遠條且. 초료차 원조차).

우리나라에서도 산초나무를 귀하게 여겨 시인, 묵객들이 작품을 남겼다. 그중에서도 희귀한 조선 전기 작품인 김정(金淨)의 「산초백두도(山椒白頭圖), 종이에 담채」가 있다. 이 빼어난 작품을 남긴 김정선생은 아깝게도 36세에 조광조 선생과 함께 기묘사화로 돌아가셨다. 18세기 감식가로 유명한 김광국(金光國, 1727~1797)은 “김정 선생의 도학과 문장은 해와 별과 같이 빛나서 모든 사람이 다 안다.”라며 소중히 평가한 글이 남아 있다.

초파나무
초파나무

산초나무와 비슷한 나무로 초피나무가 있다. 초피나무는 제피나무, 젠피나무, 난대나무, 고초나무 등으로 부른다. 초피나 무는 자연 상태에서 경상, 전라 등 따뜻한 남부지방에만 자랄 수 있다. 산초나무는 열매로 기름을 짜거나 장아찌로 담가 먹는다. 초피나무는 매운맛과 향기가 나는 잎이나 열매 가루를 먹지만, 열매로 기름을 짜서 먹지는 않는다. 둘 다 고추가 들어오기 전, 옛날 우리의 식탁에서 빠질 수 없는 매운맛을 내는 향신료였다 한다.

그런데 지금은 산초나무는 오직 열매로 기름을 짜는 유지작 물로만 쓰이고 있다. 초피나무는 추어탕이나 매운탕 등에서 비린내를 없애거나 맛을 내는 용도로만 쓰인다. 추어탕에 사용되는 향신료를 산초가루라 부르기도 하는데 이는 잘못된 이름이다. 일본인들이 우리의 초피나무 가루를 산초가루라 불러 따라서 잘못 부르고 있다고 한다. 지금도 일본인들이 지리산 근처에서 생산되는 초피나무 잎이나 열매를 사가서 가공한 제품을 일본산초가루(日本山椒, Japanese pepper)로 세계에 팔고 있다. 한국산초가루(Korean pepper)라 해야 옳지 않을까?

위 『시경』에 나오는 산초나무는 진(秦)나라에서 많이 났기에 진초(秦椒)라고 한다. 중국에서는 지금도 여러 초피나무 아종을 이용하여 다양한 향신료로 개발하여 사용하고 있다고 한다. 중국 사천요리를 통해 널리 알려져 사천후추 (Szechuanpepper), 아니스 향이 나는 후추라 하여 아니스 후추(anise pepper), 검정과 흰색의 후추와 달리 갈색이 난다고 하여 갈색후추(brown pepper) 등이 모두 초피가루들이다. 이들을 크게 보아 중국요리를 통해 알려졌으므로 중국 후추(Chinese pepper)라고 부른다.

산초나무
산초나무

산초나무와 초피나무는 같은 과여서 비슷한 데다, 쓰임새도 향신료라 흔히 혼동하기 쉽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구분하기 그리 어렵지 않다. 먼저 잎부터 서로 다르다. 입이 반들반들하고 가장자리가 매끈하면 산초나무이고, 잎이 울퉁불 퉁하고 가장자리에 톱니가 있으면 초피나무다. 가시가 어긋나게 나면 산초나무고, 마주나면 초피나무다. 익었을 때 열매의 자루가 붉으면 산초나무고, 검으면 초피나무다. 열매도 껍 질이 딱딱하고 회색이며 속에 기름이 풍부할 것처럼 통통한 검은 알이면 산초나무다. 초피나무 열매는 산초에 비해 굵지만 약간 쭈글쭈글하다. 산초나무는 새순 가지 끝에서 꽃이 피고, 초피나무는 가을에 미리 꽃망울을 준비했다가 꽃이 피기에 묵은 가지들과 잎 사이에서 꽃송이가 나와 꽃이 핀다. 자연 상태에서 초피나무는 따뜻한 지방에서 골짜기나 개울가 물이 풍부한 곳에 자라고, 산초나무는 비교적 추운 서울 등 중부지 방에도 잘 자라고 척박한 산등성이에서도 잘 자란다. 산초나무는 암수 다른 그루고, 초피나무는 암수 한 그루다. 전반적으로 초피나무가 더 크게 자라고, 산초나무는 작고 야무지게 자 란다. 큰 나무에서 껍질에 흰 점들이 빽빽하면 초피나무다.

이런 특징을 바탕으로 김정(金淨)의 「산초백두도(山椒白頭圖)」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림 속의 나무는 제목과 달리 산초나무가 아니고 초피나무다. 붉은 열매가 초피나무 열매다. 그런데 그림에서 가시는 마주나지 않고 어긋나게 나고 있다. 가시의 모양으로 보아서는 산초나무가 맞다. 이 점은 아마도 필자가 처음 지적하는 것으로 보인다. 여러 곳에 살펴보았으나 이런 지적은 보지 못했다. 그렇다고 결코 이 작품의 가치가 떨어진다는 말은 아니다.

자연 상태로 야생에서 자라는 초피나무를 직접 본 적은 없다. 그러나 고향에서 울타리에 심어 가꾸는 아주 큰 나무를 본 적은 있다. 지금도 고향의 한 친구가 밭에 작물로 키운다고 한다. 어릴 적 내 고향 산에도 소 먹이러 가면 흐드러지게 열린 산초나무가 많았다. 할머니께서는 산초 열매가 보이면 따오라 하셨다. 소가 풀을 먹는 동안 댕댕이 덩굴로 작은 다래끼를 만들고 거기에 넣어오면 절구에 갈아서 간장에 양념으로 넣어 전을 찍어 먹곤 했다. 매큼하면서도 고소한 맛이 일품이었다. 가끔 가는 서울의 한 음식점에도 불고기를 먹을 때 산초나 무장아찌를 내놓는 곳이 있다. 친구들과 가끔 들르면 산초장 아찌 덕분에 고기 맛이 더 났다.

우리 음식에서 대표적인 향신료가 고추다. 우리의 대표 식품인 김치도 고추, 마늘 양념이 없이 소금에 절여서는 절대 제맛을 낼 수 없다. 역사 시간에 임진왜란 전후로 우리나라에 고추가 전해졌다는 걸 배웠다. 고추가 들어오기 전에는 매운 양념을 무엇으로 썼는지 무척 궁금했다. 바로 산초와 초피 가루가 그 역할을 하고 있었다. 아마도 고추가 재배하기도 쉽고 생산량도 많으며 수확할 때 가시가 없어서 산초와 초피를 밀어냈을 것으로 보인다.

우리 식탁에서 산초나무와 초피나무가 거의 사라져서 무척 아쉽다. 특히 산초기름은 서양에서는 예부터 항생제나 천식 치료 기관지확장제로 쓰이고 있다. 또한 산초기름은 항산화 작용이 뛰어나 장수식품으로도 기대가 크다. 요즘 품종개량 으로 수확량도 많고 가시까지 없는 민산초나무까지 개발되었다. 산초나무는 큰 병충해도 없으며 배수만 잘 되면 척박한 땅에서도 잘 자란다. 다만 호랑나비 애벌레가 산초잎을 먹고 자란다고 한다. 낙향하면 산초나무를 키워서 호랑나비와 노후를 보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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