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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가시나무와 문화 유전자 밈(meme)

  • 입력 2024.02.15 14:52
  • 기자명 신종찬(시인,수필가, 의학박사 / 신동아의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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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엠디저널] 

날카로운 가시로 무장한 두툼한 상록수 잎들이 새빨간 열매들을 감싼다. 녹색 잎이 가운데로 모여 선홍색으로 변한 포인세티아 잎들은 카드 아래쪽에 자리 잡았다. 아스라한 곳에서 흰 수염, 빨간 옷, 뚱뚱한 산타클로스가 순록들이 끄는 눈썰매를 타고 오는데, 8분음표와 4분음표는 카드 속에서 하늘 높이 캐롤을 부르고 있다. ‘하늘엔 영광, 땅에는 평화’를 외치는 열매들을 날카로운 가시로 무장하고 지키는 이 잎은 어떤 나뭇 잎일까?

근세로 들어오며 크리스마스는, 문화 유전자인 밈(Meme) 현상으로 종교와 지역을 넘어 융합된 인류의 문화로 자리 잡았다. 내 초등학교 시절인 1960년대에는 크리스마스 카드가 무척 귀했다. 연말이면 시골 초등학교 앞 언덕 위 조그만 흙벽돌 교회에서도 확성기 종소리 따라 캐롤이 들려왔다. 겨울방학이 시작될 무렵인 12월 말에 담임선생님께서는 교실 뒤편에 소나무 가지에 솜과 색종이를 걸쳐놓고 크리스마스 카드로 치장까지 해놓으셨다. 크리스마스 트리를 처음 본 아이들은 신기한 트리 옆에 모여 손뼉 치며 좋아했다.

내용 없는 아름다움처럼//

가난한 아희에게 온

서양 나라에서 온

아름다운 크리스마스 카드처럼//

어린 羊들의 등성이에 빤짝이는

진눈깨비처럼

「북 치는 소년/김종삼, 1969」

여백과 상상의 미(美)를 한껏 살린 이 시처럼, 호랑가시나무는 잎에 날카로운 가시를 달고 새빨간 열매를 지키며 한겨울을 견뎌낸다. 호랑가시나무가 크리스마스-Christmas-의 상징이 된 연유를 알기 위해서는 먼저 예수님, 즉 그리스도(Christ)의 탄생일이 정해진 사연부터 알아봐야 한다.

학설에 따르면 예수님이 실제 태어난 날은 5월 14일경으로 본다는 주장에서부터 1월 7일, 12월 22일인 동지, 12월 25일 등 아주 다양하다. 처음 예수님의 탄생일을 공인한 일은 336년 동로마제국 콘스탄티누스 황제이며 당시 크리스마스는 오늘날로는 1월 6일이었다. 지금도 그리스정교를 믿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또 다른 기독교 종파들인 에티오피아나 아르메니아 등 여러 나라에서 1월 6일을 크리스마스로 기념한다고 한다. 그러나 서로마제국의 영향 아래 있었거나 개신교에서는 주로 12월 25일을 ‘예수 탄생일’로 기념한다.

로마제국에 기독교가 들어오기 전에도 12월 25은 축제일이었다고 한다. 페르시아의 조로아스터교에서 유래한 미트라교가 로마에 전파되어 널리 믿고 있었다. 태양의 신 미트라의 탄신일은, 태양이 다시 소생하는 동지 무렵인 12월 25일이었다. 로마 군인들이 추앙했던 ‘정복되지 않는 태양신’ 미트라는, 폼페 이우스(B.C.106~ B.C.48)의 동방원정 후에는 로마의 수호신으로 격상되었다. 로마 5현제의 막내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재위 A.D.161~181)가 미트라의 고장인 이메사(Emesa)를 정복하고 주민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게 되자, 274년 12월 25 일을 ‘정복되지 않는 태양의 탄신일’로 정해 로마제국의 국경일로 정하고 대대적인 경축행사를 벌였다고 한다.

313년에 로마제국에서 기독교를 공인한 콘스탄티누스 황제도 미트라를 좋아했다. 그는 기독교를 공인한 후에도 미트라 교의 태양신관 기독교의 하나님을 같은 신으로 간주해 두 종교를 접목시키려 했다. 이후 미트라교를 믿던 로마시민들이 기독교로 개종하였지만, 경축행사는 그대로 이어졌다. ‘무적 태양의 탄신일’을 기독교화시킨 것으로 볼 수 있다(『한국교 회사연구소/1985』). 성탄절이 정해지는 과정처럼, 인류의 문화가 이런 방식으로 퍼져나가는 현상을 밈이라 한다.

이 밈이란 단어는 리처드 도킨스가 『이기적 유전자/1976』에서 처음 사용하였다. 밈이란 고도의 인간 사유의 총체인 문화가 계승되는 구조가 마치 생물의 유전자(DNA) 특성과 닮았다는 이론이다. 도킨스는 다양한 종교, 사상, 이념, 관습 등 문화적 요소들이 유전자처럼 자기복제적 형태를 띤다며, 이들을 일종의 ‘문화 유전자인 밈’으로 명명했다. 생물학의 근본 원리로 자연 선택과 유전자가 증식하고 있다면, 문화에도 밈으로 인해 인간의 '오래된 유전자'를 제치고 빠르고 많은 새로운 정보가 폭발적으로 퍼져나가는 현상이 있다고 설명한다. 그는 그 후 『만들어진 신』에서는 더 나아가 부모들이 다음 세대 에게 '종교'라는 바이러스(=악성적인 밈)를 그대로 주입한다 고도 주장했다.

서양에서 크리스마스 트리 장식으로 자주 쓰이는 조경수인 유럽 호랑가시나무는 크리스마스 무렵에 빨간 열매를 맺는다. 호랑가시나무는 기독교 이전에도 게르만족이나 켈트족이 악귀를 물리치고 액운을 없애기 위해 자주 사용됐는데 주로 집 이나 신전에서 숭배의 의미로 많이 이용되었다. 유럽에 기독교가 들어오기 이전, 그 지역에는 나무 숭배 사상이 있었는데 호랑가시나무는 이러한 나무 숭배 사상에 사용되는 성스러운 나무였다. 이러한 이교도의 관습을 7세기부터 교회가 받아들이면서 호랑가시나무는 성스러운 나무가 되었다.

기독교에서는 예수님이 골고다 언덕을 오를 때 이마에 박힌 가시면류관을 로빈이라는 새가 벗겨내려다가 그 가시에 찔려 죽었는데, 그 새가 가장 좋아하는 열매가 바로 호랑가시나무 열매여서 오래전부터 신성하게 여겼다고 한다. 그래서 성탄절 장식에 사용하거나 크리스마스 카드를 만들 때 이 나무를 자주 썼으며, '사랑의 열매'를 상징하는 붉은 열매 역시 호랑가시 나무 열매이기도 하다.

우리나라 남부지방에도 자생하는 호랑가시나무는 감탕나무과에 속하며 키가 3m까지 자라는 상록수다. 가장자리에 대칭으로 가시가 2개씩 있는 특이한 모양의 잎과 빨간색 열매가 특징적이다. 중국에서는 늙은 호랑이 발톱 같다고 하여 노호자(老虎刺)라고 부르거나 어린 고양이 발톱같다고 묘아자(猫兒刺)라 하기도 한다. 4~5월이면 아카시아 향이 나는 앙증 맞은 작은 흰 꽃들이 다닥다닥 핀다. 그러나 꽃보다는 잎에 난 가시와 빨간 열매가 더 유명하다.

우리나라에서는 예로부터 음력 2월의 변덕스러운 날씨가 바람을 다스리는 신(神)인 영등할머니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영등할머니는 하늘에 살고 있다가 음력 2월이 되면 땅에 내려오 는데, 이때 사람들은 나쁜 잡귀들이 영등할머니를 방해한다고 믿었다. 그래서 여러 가지 방법으로 잡귀를 물리치려고 했다. 남부지방에서는 영등날 호랑가시나무 가지에 정어리를 꿰어 처마에 매달아 놓고 나쁜 잡귀를 내쫓는 풍습이 있다. 정어리의 눈알로 귀신을 노려보게 하여 귀신도 가시에 눈이 찔릴까 겁나서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기 위한 뜻이라 한다.

이렇게 크리스마스 풍습은 여러 문화가 융합된 결과다. 트리를 장식하는 풍습은 북유럽 민족들의 동지 축제 풍속에서 유 래한다고 한다. 크리스마스 캐롤은 우리나라 강강술래처럼 여럿이서 부르는 노래였고, 연말에 크리스마스 카드를 보내는 풍습은 미국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도 동지 무렵 이면 ‘팥죽 먹기’ 등 붉은색으로 악귀를 쫓는 풍습들이 있었다. 우리의 동지 풍습인 ‘팥죽 먹기’도 ‘밈 현상’으로 크리스마스에 도입되는 날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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