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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들바람과 봄의 소네트

  • 입력 2024.03.15 18:04
  • 기자명 진혜인(바이올리니스트/영국왕립음악대학교 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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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엠디저널] 매화 꽃망울에 움트는 봄기운으로 긴 겨울 움츠러든 몸을 깨우는 절기가 다가왔다. 절기상 입춘은 2월이었으나, 꽃샘추위와 봄기운이 번갈아 살랑이던 지난달이었다. 3월이라 하면 이제 진정 봄이 시작 되었다는 느낌을 곳곳에서 오감으로 느낄 수 있다. 낮시간 기온이 오르고 굳은 땅을 뚫고 올라오는 초록빛 새싹들이 솟아나며 생동의 계 절이 왔음을 알린다. 기후변화로 인해 사계의 모습이 희미해지고 있 지만 계절의 변화는 여전히 천혜의 자연경관을 우리에게 선사한다.

계절의 변화에 함께하는 음악에서 뗄 수 없는 것이 바로 계절음악, 그 중에서도 사계이다. 이미 많은 매체와 무대를 통해 대중에게 익숙해진 곡이지만, 이는 그만큼 계절을 잘 표현한 음악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바로크 음악의 정수, 사계

사계는 이탈리아 작곡가 안토니오 비발디(Antonio Vivaldi, 1678- 1741)가 1718-1720년 경 작곡하고 1725년 출판된 바이올린 협주곡으로, 비발디의 바이올린 협주곡 중 가장 유명하고 바로크 시대 레퍼토리 중 가장 사랑받는 곡이기도 하다.

비발디의 화성과 창의에의 시도 The Contest Between Harmony and Invention
비발디의 화성과 창의에의 시도 The Contest Between Harmony and Invention

이 곡은 본래의 <화성과 창의에의 시도(The Contest Between Harmony and Invention)>일부분으로 출판되었으나, 12개의 바이올린 협주곡 모음에서 사계절을 묘사한 처음 네 곡이 자주 연주되면서 현재와 같이 따로 분리되어 사계로 불리게 되었다. 수록된 모든 작품들은 솔로 바이올린, 통주저음(Basso Continuo)과 현악 5부를 위해 작곡되었다.

비발디의 사계는 표제 음악의 시초라고 할 수 있을만큼 각 협주곡의 악장들에 계절의 모습을 담은 소네트(Sonnet, 시)를 붙여서 제목과 그 내용을 통해 악곡을 더 풍부하게 표현했다. 소네트는 이탈리아에 서 유래된 시 형식으로 엄격한 운율 구조를 따르는 14행으로 이루어져 있다. 각 협주곡이 그리는 계절의 장면을 담은 짧은 시와 음악이 조화를 이룬다.

소네트는 작자 미상이나, 어떤 이들은 비발디 자신이 직접 지었을 것 이라는 추측을 하기도 한다. 사계는 소네트의 묘사를 충실히 음악화 시키며 마치 그림을 그리듯 뛰어난 자연의 풍광을 묘사한다. 특히 제 1바이올린이 독립적인 성격을 가지면서도 첼로의 독주와 어우러질 때가 있는데 이는 전체적인 음량 조절을 위한 배치로 여겨진다.

협주곡 1번인 ‘봄(La Primavera)’에 실린 소네트는 다음과 같다.

● 1악장 - “봄이 왔다. 작은 새들은 즐거운 노래를 부르며 봄에게 인사한다. 시냇물은 산들바람과 상냥하게 얘기하며 흘러간다. 그러다 하늘이 어두워지고 천둥이 치고 번개가 번쩍인다. 폭풍우가 지나간 뒤, 작은 새들은 다시 아름다운 노래를 즐겁게 부른다.”

● 2악장 - “꽃들이 만발한 아름다운 목장에서 나뭇잎들이 달콤하게 속삭이고, 양치기는 충실한 개를 곁에 둔 채 깊은 잠에 빠졌다.”

● 3악장 - “요정들과 양치기들은 눈부시게 빛나는 봄에, 양치기가 부는 피리의 활기찬 음률에 맞춰 즐겁게 춤춘다.”

1악장의 솔로 바이올린은 새의 지저귐을 표현하고, 2악장은 한가로 이 쉬는 양치기의 모습을 솔로 바이올린이 연주하고 바람에 스쳐 흔 들리는 소리는 현악 중주가 풍성함을 더한다. 한가로운 전원 풍경을 나타낸 2악장에서 졸고있는 양치기와 그 옆을 지키는 강아지가 짖는 소리는 비올라의 짧고 강한 음향으로 표현되는데, 마치 타악기 소리와 유사하다. 비올라의 음역대를 활용한 비발디의 참신한 시도이다. 3악장은 님프(nymph)들과 양치기들이 전원풍 무곡의 명랑한 백파이프 소리에 맞춰 춤추고 있는듯 하다. 실제로 3악장은 전원의 춤곡 (Danza pastorale Allegro)으로 4회 반복적으로 나오는 투티(Tutti) 사 이에 솔로가 서로 어울려 삽입되어 마치 목동들의 피리에 맞춰 추는 민속 무용을 나타내는듯하다. 봄날 백파이프 반주에 맞춰 흥겹게 춤 추는 축제의 한 장면을 묘사하는 파트로 도입부에 등장하는 지속되는 저음이 백파이프와 같이 화성의 중심을 잡아준다.

 

네오 클래식, 경계를 허물다

이로부터 약 300년이 지난 2012년, 독일 출신 영국인 작곡가 막스 리히터(Max Richter 1966~)는 도이치 그라모폰과 함께 비발디 사계를 발매하는데 이전의 발매 앨범들과는 달리 “Recomposed”라는 커버와 함께 사계 원곡의 감정과 분위기는 유지한채로 사계를 재창작 했다. 재작곡(Recomposition)이란 기존의 작품에서 익숙한 멜로디와 특징적인 리듬의 상징적 요소만 남겨두고 거기에 새롭게 창작하는 방식이다. 기존 악곡에서 일부 특징을 가져온 작곡인 것이다. 원형의 것이 여전히 느껴지나 다른 요소를 들을 수 있기에 넓은 의미로는 편곡, 리메이크에 포함되기도 한다.

막스 리히터가 재작곡한 비발디 사계 앨범 커버 이미지출처 Music Shop Europe
막스 리히터가 재작곡한 비발디 사계 앨범 커버 이미지출처 Music Shop Europe

오늘날 가장 영향력 있는 영국의 클래식 작곡가 중 한 명인 막스 리히터는 기존 클래식에 펑크록, 일레트로닉을 가미한 앨범을 꾸준히 발표하며 미니멀리즘 사운드를 대표하는 작곡가로 평가받는다. 막스 리히터가 비발디의 ‘사계’를 재작곡한 앨범을 통해 클래식 음반계에서도 입지를 넓히고 있다.

막스 리히터의 재창작된 사계는 도입부에서부터 전자 음악을 연상시키는 소리의 질감(Timbre)에도 불구하고 계속되는 악기들의 진행과 불협화음 같으나 조화를 이루는 구성으로 원곡의 느낌을 풍긴다. 그가 과의 인터뷰에서도 밝혔듯 곡의 75%는 새로 작곡 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안에 비발디의 DNA가 살아 숨쉬도록 몰두 했음을 알 수 있다.

막스 리히터의 비발디 사계 재작곡 작품의 초연
막스 리히터의 비발디 사계 재작곡 작품의 초연

막스 리히터의 사계는 2012년 10월 31일 영국 런던의 바비칸 센터 (Barbican Centre)에서 다니엘 호프(Daniel Hope, 1973~)의 독주 바이 올린과 지휘자 앙드레 드 리더(André de Ridder, 1971~ )가 이끄는 브리튼 신포니아(Britten Sinfonia)의 연주로 초연되었다. 도이치 그라 모폰과 녹음 시에는 콘체르트하우스 베를린(Konzerthausorchester Berlin)과 다니엘 호프, 지휘자 앙드레 드 리더가 참여했다.

클래식 녹음의 리믹스 방식을 채택하면서도 악곡 편성에는 1970년 대 비틀즈의 하프시코드와 클라리넷 편곡을 연상시키는 크로스오버 적 시도를 하여 또 다른 사운드를 만들어냈다. 2022년에는 초연 10주년을 기념하여 바이올리니스트 엘레나 우리오스테(Elena Urioste, 1986~ )의 연주로 발매된 바 있다. 이처럼 막스 리히터의 재작곡 시도에서 알 수 있듯 그는 장르의 경계를 허물고 작곡가의 가치관과 같이 현실에 뛰어드는 음악 세계를 구축하는 네오 클래식 아티스트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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