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interview]동 티모르 의료봉사 후기

뒤돌아 앉은 역사를 되돌리는 마음

  • 입력 2011.03.01 00:00
  • 기자명 emddaily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1L]근래에 보기 드문 강추위가 한 달 가까이 기승을 부리는 영하 15도의 엄동(嚴冬)을 헤치고 인천 국제공항을 이륙한 여객기가 20명의 단원들과 함께 폭염의 나라로 향한 날은 2011년 1월 18일이었다. 사단법인 경희-국제 의료협력회(Kyung Hee International Medical Cooperation Society)는 개발도상국의 의료 낙후지역 주민에 대한 의료봉사를 통하여 인류애를 발휘하며 의료인 본연의 임무인 의술을 구현하고 국위 선양에 이바지 하고자 1993년 3월 10일 발족한 단체로써 이제 창립 18주년을 맞이하고 있다.본 법인의 운영은 100% 회원들의 자발적 기여금으로 이루어지고 있으며 정치적, 종교적 색채를 띠지 않고 있는 순수 의료봉사 단체로 대한민국 사람이면서 봉사하고자 하는 귀한 마음이 있으면 누구를 막론하고 참여 할 수 있다. 그동안의 모든 해외 의료봉사는 각 개인 스스로가 경비를 부담하고, 참가자 개인 회원은 직장에서 개인 연차 휴가를 이용하여 봉사를 수행하여 왔다. 2011년 1월 18일부터 2011년 1월 24일까지 진행된 이번 동 티모르 딜리 지역에서의 의료 봉사는 경희-국제 의료협력회의 제 16차 해외 의료봉사에 해당 된다. 그동안 협력회는 네팔(12회), 미얀마(1회), 피지(1회), 태국(1회)에 대한 해외 의료봉사를 실시하였으며, 특히 네팔 왕국에는 티미시(市)에 병원을 설립하여 운영하다가 정상 궤도에 오른 다음에 티미시에 시립병원으로 이전하여 주었다. 폭염, 모기와의 전쟁을 시작하다이번에 낯선 이 지역에 대한 의료봉사는 법인(法人) 스스로가 결정한 일이지만, 사전에 현지 대한민국 대사관의 서경석 대사를 비롯한 박춘식 영사, 그리고 정의혜 참사관과 충분한 논의와 정보의 교환을 통하여 결정한 것이다. 사전 정보에 의하면 우리가 할 일은 진료 이외에도 35도 이상의 혀를 내두르는 더위 및 모기와의 전쟁을 하여야 한다는 것이다.모든 단원들은 참가 2주 전부터 말라리아 예방약을 복용했다.참여 봉사 단원의 면모는 강병남(건국의대 교수), 박성수(수색 성모의원장), 신옥영(경희의대 교수), 장성구(경희의대 교수), 박준봉(경희치대 교수), 이순진(성균관의대 교수) 회원과 6명의 경희의학전문대학원생, 4명의 경희치의학전문대학원생, 2명의 경희간호대 학생, 2명의 서울대학 대학원생 등 자원자 20명으로 구성되었다.[2R]티모르(Timor)는 인도네시아 말레이어의 ‘동쪽’이라는 의미의 ‘timur’에서 유래되었고 여기에 동(East, Leste)이 첨가되었으니 우리말로 번역하면 ‘동동국(東東國)’이 되는 셈이다. 포르투갈, 인도네시아, 일본 다시 인도네시아의 지배를 받아야만했던 비운의 역사를 뒤로하고, 500년의 식민통치에서 벗어나 이제 막 걸음마를 시작하는 우리나라의 강원도 크기만 한 나라다.30여개가 넘는 수하물을 전부 챙겨서 입국한 뒤 4시간 정도의 토끼잠을 자고나서, 다시 그 많은 짐을 끌고 출국해야하는 이상한 과정을 요구하는 인도네시아 발리 공항을 출발한지 1시간 40분 쯤 후에 동 티모르의 딜리 공항에 도착했다.공항에 도착해서 여객기를 내리자마자 우리를 맞이하는 것은 “헉” 소리가 저절로 내뱉어지는 폭염의 입맞춤이다. 서울의 엄동설한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비질비질 쏟아지는 땀방울과 등짝에 들어붙는 와이셔츠는 귀찮기만 하였다. 진료 의약품의 통관이 된다, 안 된다 실랑이가 벌어졌지만 현지 대사관 영사와 참사관의 도움으로 겨우 해결 되었다.해외 의료봉사 때마다 현지 공항에서 느끼는 일은 상대방은 우리를 절대 반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오히려 적대적인 눈빛을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일은 관료들의 일탈된 행동일 뿐, 우리가 함께 손잡고 마음을 나눌 순진한 반려자를 만나는 순간 불편했던 군더더기 마음은 바람 같이 사라진다.잠 못 이루는 남국의 밤, 새벽을 깨우는 기도소리해수면에서 불과 2미터 정도의 높이 밖에 안 되는 화산석의 육지로 밀려오는 파도는 항상 고만큼만 왔다가 고만큼만 밀려간다. 태풍도 돌아간다는 티모르 해(Timor sea)의 비취빛 청정함은 더위도 잊을 수 있고, 육지 가까이까지 접안 되어있는 대형 화물선은 이 나라 미래의 꿈을 머릿속에 그려 볼 수 있게 한다. 포장은 되었지만 여기저기 움푹움푹 파인 길을 동 티모르 보건부에서 지원한 버스의 노련한 기사는 요리조리 잘도 피해 달리고, 이곳에서는 중산층들이 타고 다닌다는 자그마한 오토바이가 중앙선도 없는 길에서 보여주는 곡예는 서울의 철가방을 닮은 듯하다. [3L]척박함과 자연스러움이 애써서 어우러진 도심의 길가에 늘어선 상점들은 널빤지 몇 개를 서로 잇대어 놓은 것이 전부다. 알록달록 원색의 옷가지를 걸어놓았지만 오가는 사람들도. 옷을 사려는 손님들도 없어 가게 주인은 졸음을 쫓고 있다. 이름을 알 수 없는 과일들을 모닥모닥, 옹기종기 쌓아놓은 노점 주인은 애기에게 젖 물리랴, 달려드는 파리 쫓으랴 자연산 나뭇가지 부채를 연신 흔들어 댄다. 영화 아바타에서 보았던 늠름하고 기상 있어 보이는 울창한 나무를 보며, 남국(南國)의 색다른 정취의 짧은 상념에 빠질 즈음 팔뚝이 따끔해지는 통증과 함께 한 마리 모기의 첫 선물을 받으며 여인숙 같은 숙소에 도착했다.방 속의 공기는 더욱더 숨을 턱에 닫게 하고, 악취는 아니지만 어떻게 표현하여야 할지 모르겠는 냄새의 첫 경험은 빨리 적응하는 것이 남은 일정을 편안하게 보낼 수 있는 지름길임을 암시한다. 앞으로 며칠을 묵어야 할 이 방에서 나를 제일먼저 맞이해 주는 것은 벽에 붙은 작은 도마뱀이었다. 어차피 이곳에서는 저들과 이렇게 함께 밤을 지새우는 것이 가장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하고 눈인사만 나누었다.개인 짐을 풀 겨를도 없이 서둘러 진료소가 마련된 성당으로 달려가 내일의 진료에 대한 준비를 마치고 대사관을 방문하니 대사님 내외분과 함께 통역을 맡아주실 교민들께서 반갑게 맞이하여 주셨다. 이곳에는 전체 약 60여분의 교민이 상주 하신다는데 아마 반쯤은 오신듯하다. 그중에서는 트럭을 타고 6시간을 달려오신 교민분들도 계셔서 가슴 깊은 곳에서 뭔가가 울컥하는 감사를 느꼈다.웽웽 소리를 내며 돌아가는 에어컨이 소리만 요란하였지 방안은 점점 더워지고 등짝이 끈적끈적해진다. 잠 못 이루는 남국의 밤을 이리 뒤척 저리 뒤척이는데 어디선가 길게 내뽑는 늘어진 주문 같은 노래 소리에 눈을 떠보니 4시에 올리는 무슬림의 기도소리였다. 국민의 10% 정도 밖에 안 되는 사람들이 이웃의 선잠을 깨워도 아무도 탓하지 않는 사람들이 오히려 평화롭게 느껴진다. 연이어 들려오는 귀에 익은 새벽 닭 울음소리가 긴 여운을 남기며 들려온다. 한순간 어린 시절 고향 집 닭장속의 횃대에 올라앉아 늠름하게 붉은 턱벼슬을 늘어트리고 새벽을 알리는 일성을 질러대는 마치 장기같이 생긴 우리 집 수탉이 생각난다.새벽 바다는 평온의 절정이다.저 멀리 푸른 수평선과 입맞춤하는 하늘은 그 빛깔이 그 빛이고, 비릿한 냄새가 있을 법하지만 그곳에는 비린내도 없고 철석거리는 파도도 없다. 누가 볼 새라 살금살금 물러가는 아침 썰물이 오히려 고요함을 더한다.밀려드는 환자들의 파도, 정신없이 하루는 그렇게 지나가고역시 외기 온도 50도 차이를 극복하는 것은 그리 녹녹한 일은 아닌 듯하다. 특별한 이유도 없이 진료 첫날부터 몸이 무겁다. 젊다는 것은 분명히 엄청난 자산이다. 대학원생들은 전혀 피곤한 기색도 없이 환자들을 안내하기 위해 이리저리 발랄하게 뛰어 다닌다. 손목에 하나, 발목에 하나, 집 사람이 마련해준 모기퇴치 밴드를 쇠고랑 차듯 두르고 나니 마치 모기한테 체포된 기분이다. 밖에서는 교민들과 우리말을 배운 현지 젊은이들이 밀려드는 환자들을 정리하는 소리가 요란하고 안에서는 내과계, 외과계, 안과, 치과와 약국이 서로의 방에서 분주한데 갑자기 이순진 교수의 희망찬 탄성이 터져 나왔다. 달려가 보니 그 어느 때 어느 누군 인지 몰라도 날렵한 초음파 기계를 이곳에 기증한 모양인데 사용자가 없어서 후미진 방 한 구석에 조용히 모셔 놓았던 것을 발견한 것이다. 교수가 팔을 높이 들어 환영한다. “저 지금부터 뒤치다꺼리 안하고 환자 볼래요.”“아이고 신세는 이 장성구가 제일 많이지게 생겼네요!”동 티모르의 파도는 아주 소용하다고 했는데 밀려드는 환자들의 물결은 거세기만 하였다. 놀라게 한 것은 박준봉 교수의 치과 장비였다. 워낙 봉사를 많이 다니는 분이라서 그런지 자비 수백만 원을 들여서 장만하였다는데 궤짝만 한 철가방을 좌우로 열어젖히니까 그 속에는 질서 정연하게 치과의원하나가 통째로 들어 있었다. 전기 모터, 썩션 등등 참으로 귀엽고 효과적인 장비였다.환자들의 구성은 어느 지역이나 그렇듯이 만성 기관지염, 만성 소화기 질환, 퇴행성 관절 질환 등이 많았는데 이곳의 기후적 특징과 생활상을 대변하듯이 만성 중이염이 넘쳐흐르고 습한 날씨 때문인지 진균성 피부 질환이 매우 많았다. 그런데 비뇨기과 의사로서 입이 딱 벌어지는 일은 요로 결석 환자들이 상상할 수 없게 많았다는 것이다. 진단을 내리기도 전에 이미 환자들이 먼저 이야기를 꺼낸다. 수시로 소변에 돌이 섞여 나오고 지금은 옆구리가 몹시 아프다는 것이다. ‘아! 이 순간에 이들에게 비뇨기과 의사인 내가 해줄 수 있는 게 없구나! 그래도 정확하게 진단은 붙여 주어야지.’이순진 교수의 초음파 검사실이 바빠지기 시작했다. 이미 모양상 콩팥이 많이 나빠진 노인 분들은 많았고, 안타까운 일은 10대의 청소년들이 요로 결석으로 수신증을 보이고 있는 것이었다. 고온 때문에 쉽게 탈수에 빠질 수 있고, 햇볕에 오래 노출됨으로써 vitamine D의 형성이 많아지는 문제가 주원인이며, 이곳의 식수에 많이 포함된 석회질도 문제가 될 것으로 생각한다.첫날은 긴장된 상황이라 하루가 어떻게 지나갔는지도 모르겠다.주인집에서 에어컨도 손 보고, 첫날의 피곤함에 싸여 무슬림의 기도 소리도, 첫닭의 울음소리도 멀리 한 채 아침까지 골아 떨어졌다. 오후부터는 학생들의 행동이 서서히 굼뜨고, 지친 모습이 언듯언듯 눈에 들어온다.이틀간 실 진료인원 680명, 모두의 얼굴엔 피곤함보단 아쉬움이안과의 강병남 교수가 어이없는 표정을 짓고 있다.엄마 따라 진료 받으러 온 7살짜리가 가까운 곳이 잘 안 보인다는 것이다. 노인들을 위하여 나누어 주려고 몇 백 개의 돋보기를 준비하여 전날 나누어 준 것이 소문이 난 것이다. 돋보기를 씌워 주니까 잘 보인다는 것이다.강 교수님 왈 “갖다 아버지 드려라.”어제 초음파 진료에 대한 소문이 난 모양이다. 환자마다 호소하는 내용이 내가 초음파 진료 처방을 낸 환자들의 호소 내용과 모든 것이 일치한다. 인간 세상 어디에나 구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는 뭔가 보이는 법이 아니겠는가.“네, 초음파 한번 하시지요.”“감사합니다(오브리가도).”더위에 줄 땀을 흘리면서 여성 단원들이 물을 마시지 않는다. 자꾸 마시라고 해도 막무가내다. 내 채근에 못 이겨 한 여학생이 마지못해 대답 했다.“교수님 화장실 갈 일이 생길 것 같아 안 마셔요”이게 무슨 소리인가. 화장실을 열어보니까 양변기는 있는데 걸터앉을 좌대가 떨어져 나간 것이다. 대사관 직원들도 남녀를 막론하고 지방으로 출장을 가면 체면불구 대자연의 광활한 화장실을 애용한다는 뒷이야기도 들었다. 어제에 이어서 오늘도 얼마 안 되는 돈을 드리고 교민에게 부탁한 점심이 왔다. 진료진과 교민, 도와주는 현지 젊은이들이 뒤섞여 스티로폼 쟁반을 받쳐 들고 계단에 앉아서 먹었다. 그러나 최대한 빠른 속도로 먹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수많은 파리들의 일제 공습을 받기 때문이다. 군에서 훈련 받을 때 말고는 그렇게 엄청난 속도로 밥을 먹어보기는 참 오랜만이었다. 현지의 젊은 봉사자들과 말은 통하지 않았지만 한식(韓食)의 즐거움을 함께하였다.7살짜리 소년이 다리를 다친 지 수개월이 되었는데 무릎 위쪽에 혹이 없어지지 않는단다. 어머니의 얼굴에는 상심함으로 가득했다. 그도 그럴 것이 현지의 클리닉에서는 몇 번을 가도 두고 보잔다는 것이다. 천하의 보도인 초음파는 이럴 때 쓰라고 있는 것이다. 초음파에 보이는 것은 오래된 혈종이었다. 피부를 마취하고 주사 바늘을 찌르자마자 아이의 비명 소리와 함께 천지가 암흑이 되었다. 아이는 계속 소리 지르고 전기는 들어오지 않고, 등에서 식은땀은 줄줄 흐르고, 한참 만에 빼낸 피고름의 양은 내가 흘린 땀만큼이나 많았다.치과에서는 입속에서 썩션해 내는 물보다도 많은 땀을 흘리며, 한창 치료 중인데 전기가 나가면 환자의 벌린 턱을 잡고 버텨야 한다.눈의 익상편을 절제하는데 전기가 나가는 것을 상상해보면 정말 눈앞이 깜깜해 진다. 그러나 다행히 안과 수술 중에는 그런 불상사는 없었다.발바닥에 호두만한 종괴를 갖고 환자가 왔다. 초음파 덕에 종괴는 주위와 잘 구분되고 위치도 깊지가 않았다. 언제부터 생겼냐는 물음에 인도네시아로부터 독립되기 전부터 있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한참 손가락을 꼽아 보아야 흘러간 세월을 가늠할 수 있다. 종괴를 제거하고 난 뒤 고마워하는 저 진실한 모습을 보아서라도 상처가 잘 나아야 될 터인데 하는 고민을 해본다. 언제든지 의료봉사 때 마다 제일 힘든 곳이 약국이다. 의학전문 대학원생 중에 약학대학을 졸업한 학생이 있어 마음 놓고 맡길 수는 있었지만 옆에서 약을 싸고 줄을 세우며 도와주는 사람들은 단 한순간도 앉을 겨를이 없다.이틀 동안 정신없이 진료한 실 인원은 680명이다. 약 100여명은 어쩔 수 없이 돌려보내야 했다는 교민들의 말을 들으니 마음이 어수선하다. 그러나 지칠 대로 지친 단원들의 얼굴을 보면 미안하고 감사할 뿐이다. 여기서는 뛰는 대사라고 별명이 붙은 서경석 대사님이 노익장을 자랑하며 매일 같이 진료소를 방문하여 우리를 격려하고 사기를 올려 주셨고 보건부에서도 고위 공무원의 방문이 이어졌다. 인도네시아의 무슨 저널의 기자라는 친구가 찾아와 인터뷰를 요청하기도 하였다.해외봉사의 경험이 없는 사람이 들으면 웃긴다고 생각할 수 있다. 일주일 봉사에 겨우 이틀 진료하는 것이 고작이냐고 말 할 수 있다. 생각해보면 아주 비효율적인 일이다. 그러나 그런 생각은 우물 안 개구리 같은 소리다. 이번 같은 경우는 오고가는데 4일이나 소요되는 문제도 있지만, 그것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3일을 줄기차게 진료하고 단원들이 완전히 기진맥진하여 쓰러졌던 네팔에서의 쓰라린 경험을 맛본 이후 나는 절대 2일 이상 진료하지 않는다. 이것은 해외 의료봉사에서의 철칙이라고 알면 될 일이다. 이곳은 관광을 할 곳은 없는 지역이다. 500년의 식민 지배 속에서 남아난 이들만의 고유한 문화는 없다. 없다기보다는 빼앗겼다는 말이 옳을 것이다. 합법적으로 통용되는 것이 미국 달러인데 위조지폐에 대하여는 경계심이 강하다. 아마도 위폐를 감별할 능력이 없어서인지 몰라도 미국 달러의 신권은 이들이 본 일이 없어서 절대 안 받는다. 정 말이 안 통하면 자기가 갖고 있는 달러를 내민다. 이것하고 똑같이 생긴 돈만 받는다는 말이다.억압과 수탈의 역사, 하지만 아이들의 눈엔 밝은 미래가 담겨있어국립병원과 국립대학 한곳씩을 방문하기로 결정하였다. 병원에 들어섰을 때 적지 않게 놀랐다. 엄청나게 넓은 대지에 2층까지만 올린 병동과 병동 사이에 아주 깨끗하게 정돈되어 있는 통로와 그 주위에 잘 가꾸어 놓은 잔디밭이 마치 외국 영화에 나오는 최고의 휴양 시설의 모양을 꼭 닮았다. 여기서는 남녀 환자들이 사용하는 병동 자체가 분리되어 있었다. 그러나 역시 내부 시설은 빈약하기 이를 데 없었는데 그래도 우리나라에서 지원해 주어서 설치된 C/T scan이 두 대 있었고, 혈액 투석기가 두 대 있었는데 사용할 부품이 없어서 작동을 못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의료 시설은 이렇고, 국민들의 자국 의사에 대한 신뢰도가 매우 낮았는데 이유인 즉 이 나라에는 의과대학이 없어서 매년 정부에서 학생을 선발하여 쿠바에서 의학교육을 받게 한다는데 그 사람들이 귀국을 꺼려서 문제가 된 적이 있고, 귀국하여 진료를 하는 의사들도 적극성이 결여되어 있는 것 때문으로 생각된다. 동 티모르의 국립대학은 시설이나 교육 환경은 매우 열악하고, UN에서 지원을 받아 운영하고 있지만 학생들만큼은 이 나라의 수재들만 모여 있는 곳이라고 부총장의 설명이 있었다. 이 대학에 한 달에 16달러의 월급을 받고 자원 봉사를 하며 경제학을 강의하는 경희대학교 평화복지 대학원 출신의 최창원 교수가 우리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나는 이곳 학생들의 맑고 초롱초롱한 눈을 보면서 이 나라의 미래를 보았다. 오백년이라는 기나긴 질곡의 역사. 수탈과 억압 그리고 상실과 좌절만 존재했던 뒤돌아 앉았던 역사를 이들이 되돌려 놓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기 위해서 이들은 오늘도 뛰고 있는 것이다. 생로병사야 어쩔 수 없는 인간의 숙명이라지만, 처참한 빈곤만이라도 없다면 이곳의 척박함을 남국의 낙원으로 바꾸어 놓을 수 있다고 믿는다. 이번에 우리들의 이 작은 활동이 여름밤을 수놓는 반딧불처럼 이들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희망을 걸어 보면서 폭염이 쏟아지는 동 티모르에서의 의료 봉사 활동을 마쳤다.봉사에 참여하였던 우리 학생들이 말하는 느낌은 한결 같았다. 대한민국에서 태어난 것이 정말 행복하다는 것을 이제 알겠다는 것이다.“너희가 그렇게 느끼기 까지는 너희 할아버지, 아버지 세대의 피땀이 서려있다는 것을 꼭 기억해라”는 말이 혀끝까지 맴돌았을 뿐 차마 입 밖으로 내뱉지는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