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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sitation]환자만을 생각하며 걸어온 26년의 외길 인생

정내과(구 정우제내과) 정우제 원장

  • 입력 2011.03.01 00:00
  • 기자명 emddai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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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L]1986년 9월 처음 이곳 대림동에 개원을 할 때 그의 나이 서른아홉. 잘 나가던 대학교수를 관두고 병원을 열겠다니, 그것도 허허벌판에 지지리도 가난한 동네를 등 떠밀려도 아니고 자진해서 찾아가겠다고 하니 참 주위에 반대도 많았다. 하지만 그는 주위의 만류를 뿌리치고 결국 그곳에 병원을 열었다. 처음에는 주위 사람 말대로 참으로 적적하게 보냈다. 병원이라고 덩그렇게 자리는 잡고 있지만 찾는 환자가 없으니 병원이라고 하기에도 참 멋쩍었다. 그래도 간혹 찾아오는 환자가 있으면 찡그린 낯 한번 보이지 않고 열심히 진찰을 했다. 나름 유능하고 실력 있는 의사라고는 했지만 확신이 서기 전에는 절대로 섣부른 판단을 내리지 않았다. 별의 별것을 다 묻는다고 짜증내는 환자도 있었지만 어느 샌가 서서히 그들은 그 젊은 의사에 대한 믿음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1년이 넘을 무렵 그곳은 미리부터 줄서있거나 예약을 하지 않으면 진찰을 받을 수 없을 정도로 환자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26년이 흐른 지금 그 젊은 의사의 머리에는 서리가 내렸지만 그때나 지금도 사람들은 그를 보기 위해 오늘도 줄을 서고 있다. 그리고 그는 바로 구로 지역의 터줏대감, 그 이름 석 자면 모르는 사람이 없다는 정내과(구 정우제 내과)의 정우제 원장이다. ‘보람’을 찾아 떠난 개원의의 길“이곳에 개원을 하기 전에는 이화의대 동대문병원의 내과 과장으로 있었어요. 그러던 중 아버님의 권유도 있었고, 저 역시 좀 더 많은 환자를 만나고 싶다는 생각에서 개원을 하게 되었습니다. 처음 이 지역이야 참 힘든 곳이었죠. 가난한 사람도 많고, 병든 사람도 많고… 젊은 나이였지만 보람을 찾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이곳을 택하게 된 것이죠.”


정우제 원장이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이곳에 개원을 한 것은 바로 ‘보람’을 찾기 위해서였다. 당시 주위에는 고대병원이 있기는 했지만 다른 병·의원은 전무한 상태였다. 없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분명 있겠지만 그렇다고 그냥 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누군가 가야 할 곳이면 내가 앞장서겠다’는 신념으로 정 원장이 두 팔 걷어붙이고 나선 것이다. “당장 의료기관이 필요하다는 것은 알았지만 막상 와보니 생각보다 더 열악했습니다. 그래도 지역에 내과가 생겨 내시경을 한다고 하니 한분 두 분 병원을 찾아오기 시작했죠. 그리고 아픈 사람은 왜 그리도 많은지. 다른 곳에서는 한 달에 한두 건 찾아내는 위암이었지만 저희에게 대여섯 건은 기본이었습니다. 지금은 시간이 많이 흘러 그렇게 어렵게 살던 분들은 다 떠나셨죠. 그리고 이곳이 이렇게 변할 지 누가 알았겠습니까. 지금은 공단 대신 디지털단지가 들어서고 최고급 아파트가 가득 메우고 있으니 말입니다. 상전벽해(桑田碧海)란 말은 이럴 때 쓰는 말이 아닌가 하네요 세월은 대림동 일대를 송두리째 바꾸고 수많은 병원들이 다시 들어섰지만 오직 하나 정우제 원장의 명성만은 감히 바꿀 수 없었다 환자에게 최선을 다하고 의사라는 이름에 책임을 지라!소화기 내과에서 신경과까지 두루 섭렵한 의사라는 소문이 퍼지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젊고 유능한 젊은 의사를 보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아무리 까다로운 환자라도 정우제 원장 앞에서는 길게 투정을 부릴 수 없었다. 왜냐면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대충 넘어가는 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조금이라도 병이 의심된다싶으면 어떻게 해서든 찾아내고야 마는 정 원장의 치밀함에 환자들이 두 손 두 발 다 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 원장이 이곳에 있으면서 가장 많이 발견한 것도 바로 위암이었다. 정 원장의 그러한 성품을 기억하는 환자들은 서울이 아닌 아무리 멀리 떨어진 곳에 있어도 지금도 정내과를 찾는다. 이런 정 원장의 꼼꼼함은 그의 오랜 의료철학에서 비롯되었다. “딱히 의료철학이라고 할 게 있나요. 최선을 다하고 의사라는 이름에 책임을 질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절대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죠. 조급한 마음에 자꾸 ‘빨리빨리’를 외치다보면 오진이 나올 수 있습니다. 병이라고 의심이 되면 확신이 들 때까지 검사를 계속해야 합니다. 아주 예전 한의사들은 얼굴을 보거나 진맥을 통해서 병을 찾았다고 하지만 현대의학은 그게 아니지 않습니까? 아무리 그래도 매일 보는 환자 수가 한둘이 아닐 텐데 어찌 그럴 수 있을까하고 물으니 정 원장은 “오래 전 불교에 심취한 친구가 제게 해준 말이 있습니다. 짜증내고 화내는 환자가 있으면 얼마나 아프면 저럴까라고 생각하라고, 그리고 환자에게 보시布施를 하는 마음으로 그때그때 진료에 임하면 반드시 자신에게도 복이 온다는 말이었습니다. 그 후 환자를 보는 일을 복을 쌓는 일이라 생각하니 제가 하는 일에 모든 것이 즐거워졌습니다”라고 말한다. 천생 의사라는 말은 분명 정우제 원장 같은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리라. 크다고 다 좋은 것 아니야, 지금의 모습에 최선을 다할 터“의사가 되지 않고 다른 일을 했었더라면 지금 정도의 행복을 느끼기는 힘들었을 겁니다. 권위나 카리스마와는 좀 거리가 있는 사람이라 사업을 했으면 힘들었겠죠. 아무리 생각해도 제게는 의업이 가장 잘 맞는 것 같습니다.”소심한 성격 탓에 큰 사업은 힘들 것 같다고 말하는 정우제 원장. 하지만 ‘인사人事가 만사萬事’라고 했던가, 병을 고치고 환자를 낳게 하는 일이 모두 사람에 관계된 일이데 사업이 어렵다 한들 의사보다 힘들까. 돈을 구하는 일이 아닌 사람을 구하는 일로 더 큰 사업을 성공시켰으니 지금이 가장 행복하다는 정 원장의 말이 아주 틀린 것은 아닌 것 같다. 사실 정 원장이 의사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수의사인 아버지의 영향이 컸다. 그가 어린 시절 아버지께서는 “나는 평생 동물들을 고치고 살았다. 한 집에 수의사가 둘일 필요는 없으니 너는 사람을 고치도록 해라”라는 말씀을 늘 가슴속에 품고 살았다. 그리고 부전자전이라고 했던가 정 원장의 아들역시 예전 그가 그랬던 것처럼 아버지의 모습을 보고 의사가 되었다. 거기에 정 원장의 부인은 같은 지역에서도 이름난 ‘박금자산부인과’의 박금자 원장이다. 한 집안에 의사가 줄줄이 있으니 ‘종합병원을 만들어보는 것이 어떠냐’는 제의를 많이 받는다고 한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정 원장은 일언지하에 거절하며 “다들 큰 것만 찾는데 크다고 다 좋은 것만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냥 지금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고 싶습니다”라고 일축한다. 단지 정 원장이 바라는 것이 있다면 지금의 종합검진과 건강검진 시스템을 강화해 환자에게 최상의 검진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2R]“현재 함께 진료를 담당하고 있는 박휘라 부원장님은 내분비학을 전공하셨습니다. 그런데 성격이 엄청 꼼꼼하시고 너무 친절하셔서 지금은 저보다 부원장님을 찾는 사람들이 더 많습니다”라며 사람 좋은 웃음을 보이는 정 원장, 거기에 “다른 것보다도 사람 운은 제가 많은 것 같습니다. 저희 직원들은 거의가 십년에서 이십년이 넘게 저와 함께 지내온 분들입니다. 이제는 말이 필요 없을 정도로 손발이 잘 맞습니다. 거기에 늘 친절하고 밝은 모습은 정내과의 자랑입니다”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팔불출이라고 해도 상관없다, 자기 사람을 아끼는 사람은 어디를 가나 신뢰를 받기 마련이다. 자기 얘기보다 다른 직원들 얘기에 더 밝아진 정우제 원장의 얼굴이 너무나 아름답다. 참의료의 진정한 모습을 깨닫게 해준 ‘정내과’와 ‘정우제 원장’26년이라는 시간을 달려오면서 너무 병에만 매달리지 않았나 오히려 걱정하는 정우제 원장, 하지만 그는 이미 환자의 마음까지 다스리는 의사가 되었다는 것은 그동안의 시간과 쌓여온 신뢰가 증명하고 있다. 때로는 힘든 일도 있고 때로는 어려운 일도 있었다. 하지만 26년이라는 시간동안 아무리 비바람이 거세도 이곳을 지키겠다는 약속을 꿋꿋하게 지켜온 정 원장을 이곳을 거쳐 간 환자는 물론 모든 지역주민들은 기억하고 있다. 노력으로 쌓은 신뢰를 믿음으로 돌려준 정내과와 정우제 원장, 그리고 지역주민들의 모습에서 참의료의 진정한 모습을 다시 한 번 깨닫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