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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OPINION 전문가 칼럼 신승철
[doctor's essay] ‘성찰省察’에 대하여
버스터미널에 나와 시골집으로 갈 버스를 기다리는 노인. 긴 의자에 홀로 앉아 유리창 밖 풍경을 멍하니 응시하고 있다. 80세가 넘어 보이나 여느 시골 노인네모양 남루한 옷차림이다. 병약해 보인다. 다른 의자엔 젊은 사람들이 두어 셋 모여 앉아 있는데, 그 노인 옆은 빈자리다. 시간이 좀 지나도 그 노인 옆 자리엔 사람들이 좀체 앉으려 하지 않을 기색이다.
이런 모습의 관찰에 따른 연상이다. 그 노인을 바라보는 다른 사람의 시각에 대해서다. 몇 가지 부류가 떠오른다. 혹자는 그를 더럽거나 지저분한 존재로 생각할 것이다. 가난해 뵈는 행색으로 보아 불쌍하고 외로운 노인으로 여길 수도 있다. 막연히 노인에 대한 두려움이나 부정적 감정을 갖고 있는 이, 또는 옆에 있다가는 그 노인이 별 쓸데없는 말을 늘어 놓을까봐, 진즉에 귀찮아 거리를 두려는 이도 있을 법하다. 갈 데가 없어 배회하는 ‘위험한’ 노인쯤으로 생각이 스치는 이도 있겠다. 그런가 하면 이런 노인을 보고 우리 사회가 어떤 좋은 복지 혜택이라도 있어야겠다는 생각을 여는 이도 있을 듯하다. 또 순진한 호기심을 갖고 다가가 군말이라도 친근하게 나누려는 이도 있겠다.

이런 노인의 상황이든 어떤 다른 현실적 상황이든, 이를 보는 관점에 있어 사람들 속마음의 반응은 이렇듯 엇갈리며 각양각색이리라. 그리고 각기 관점의 차이는 통칭 ‘의식 수준'의 차이라 불러도 무방할 게다.
한편 거꾸로 입장을 바꿔 노인이 바라보는 견해도 가정된다. 그 노인은 어떤 사람에게선 신뢰감, 따뜻함 같은 걸 느낄 테고, 어떤 이에게선 두려움이나 냉랭한 기운 같은걸 느낀다. 노인은 어떤 경우 불편한 상대에 대해 좀 화가 날 수도 있고, 무덤덤한 태도다. 다른 경우 기쁘게도 느낄 수 있다. 간추려 보자면 우리가 어떻게 생각하고 반응하느냐에 따라, 그 대가가 그대로 고스란히 되돌아온다는 설명이다. 해서 다른 사람의 언행에 대해 우리가 어느 수준으로 반응해야 하는 지, 그게 정말로 쉬운 일이 아님을 실감케 한다.

누구나 갖고 있는 사람의 그 ‘의식’이란 것은 본래부터 다 깨끗하고 순수한 그 무엇 아니었겠는가. 허나 살다 보면 우리의 그 의식이란 바탕위에는 태생부터 지금까지 죄의식이니, 미워함이니, 잡다한 앎, 여러 개인적 경험에서 나온 감정이나 기억의 덩어리가 움직여 채색이 된다. 그리고 각자는 채색된 그 의식을 바탕으로, 자기의 세상 경험에서 나온 생각만이 정확한 거라 믿는 경향이 높다. 당연한 인과(因果)다. 그리하여 예컨대 뭘 좀 배웠다는 사람일수록, 내가 뭘 잘 안다는 자존심을 굳건히 지키려, ‘부정적인’ 방어책에 쓸데없는 힘을 많이 쏟는 경우가 있다. 남에게 쉽게 투사하려는 경향은 에고(자아)의 본래적 습성이기도 하다. 하나 쉽게 남 탓하는 것도 사실 깊이 살펴보면 내 문제일 때가 많다. 이런 까닭에 사물을 바라봄에 있어 ‘있는 그대로’ 본다는 일이 실상 매우 어렵다는 거다.

흔히 인간관계나 일상의 대화에서 겸손이라든가 이해심이 강조되는데, 알다시피 그런 연유의 관계 때문이다. 에고에 대한 그런 이해의 바탕이 없는 사람은 으레 오만이나 자만심이 가득한 사람으로 비칠 수 있다. 사실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에 의미 없는 행동이란 없다. 하여 스스로 ‘자연’에 비추어 그날그날의 행동에 있어 모자란 점 또는 넘쳤던 점은 없었는지 살펴보는 일은 매우 의미 깊고 소중한 일로 생각 된다. 수시로 자신의 의식 또는 마음에 투영된 사물의 모습이나 여러 사념들을 조용히 응시해 보는 습관, 그것만으로도 ‘성찰’의 가치는 충분하리라.

탐욕이 과장 포장되고 정당화되는 세상이다. 자아도취와 자아분열이 혼재 돼 있다. 그 근저엔 물론 두려움이 크게 작동 한다. 해서 인간관계에서 여러 잘못된 ‘반응’들이 얼마든 예견 된다. 갈등들의 중첩 현상, 이른바 카르마(업)만 더욱 더 쌓을 뿐인 것이다.
성찰이란, 다른 말로는 그 조용한 응시를 통해, 자기의식의 어두운 창고에서 튀어 나올지 모를 사념에도 빛을 비춰주는 일이기도 하다. 내 마음속에 일어나는 느낌이나 생각을 자주 관찰자의 입장에서 살펴보는 일도 포함 된다. 무엇이「사실」인지는, 사실 다른 사람에 대한 공감이나 주의 깊은 경청이 없다면 알기 어렵다는 것도 마땅한 이치다. 이 모든 성찰이나 인식의 주체가 ‘(주인) 없음’이란 데까지 이르면, 감히 하늘의 도(道)에 근접했다고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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