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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화의 그림모델 ‘마하’의 신원확인 사건(2)

불륜화가이면서도 질타하여 그린 불륜왕실그림

  • 입력 2012.12.07 00:00
  • 기자명 emddai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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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야가 ‘옷 벗은 마하(1800)’를 그릴 당시의 스페인은 이미 몰락한 국가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왕실과 귀족들의 사치와 향락은 극에 달했다. 그것은 베르사유 궁으로 상징되는 프랑스의 화려한 궁정생활을 모방하고자 하는 열망이 전 유럽에 번졌던 탓이다. 프랑스에서 그러 했듯이 스페인의 상류층들은 하늘아래 존재하는 모든 유희에 흠뻑 탐닉하여 살다가 그것마저 싫증을 느끼고는 남성위주의 공공연한 불륜에 빠지다 못해 여인의 나체화를 화가들에게 그리게 하였다. 그래서 화가들은 하는 수 없이 신화를 빙자한 나체화를 그리게 되었으며 그 대표적인 화제(畵題)는 비너스였다. 그러나 고야는 신화를 빙자하지 않은 평인의 나체화를 그렸기 때문에 결국은 ‘이단죄’로 종교재판을 받게 되었으며 그림의 모델에 대한 신원을 밝히지 않아 모델을 둘러싼 갖가지 추측을 불어 일으켜 사회문제가 되였던 것이다.

[1L] 그림 1. 고야 작: ‘마리아 루이사의 초상’ (1789) 마드리드, 타바칼레라

이 무렵에 스페인 사회에서의 불륜의 극치라 할 것은 왕비인 마리아 루이사(Maria Luisa)와 마누엘 고도이(Manuel de Godoy)의 관계였다. 고도이라는 시골청년은 1784년 왕실근위대에 입대하였는데, 당시 왕위계승자였던 카를로스(Carlos)의 아내인 마리아 루이사의 눈에 들어 곧 그녀의 정부(情夫)가 되었다.


1788년 카를로스 4세가 왕위에 오르자 남편을 휘어잡고 있던 마리아 루이사는 카를로스를 설득해 고도이를 고위관직에 앉히게 했다. 고도이는 1792년 육군 원수이자 최고 국무장관이 되었으며, 결국 일약 재상이 되여 일국의 통치를 좌지우지하던 그 당시의 고도이의 모습을 화가 프란시스코 베이유 (Francisco Bayeu y Subias 1734?1795)가 그린 것이 ‘마누엘 고도이의 초상(1790)’이다.

이 무렵에 카를로스 4세는 고야에게 왕실가족의 초상화를 주문하여 탄생된 것이 ‘카를로스 4세의 일가(1800)’다. 이 작품에서 왕실 가족들은 빛나는 화려한 의복과 여러 개의 왕실훈장이 달린 어깨띠를 하고 있다. 화려함과 광휘에도 불구하고 고야는 자연스러운 묘사방식으로 인물 개개인의 특성을 표현하였다.

[2L]그림 2. 프란시스코 베이유 작: ‘마누엘 고도이의 초상’ (1790) 마드리드, 성 페르난도 왕립 아카데미

이 그림에서 카를로스 4세는 화면의 중앙도 아닌 뒤로 보이는 어두침침한 액자 사이에 비스듬히 서서 불룩 나온 배가 탐욕스러워 보이기도하며, 국사는 아랑곳하지 않고 시계 수집에만 열을 올린 매부리코의 왕은 멍청한 눈매로 서 있다, 왕비 또한 심술이 잔뜩 난 듯한 얼굴로 그림 한 가운데 있는 것으로 궁정을 실질적으로 장악하고 있는 그녀가 왕 대신 정사를 돌보고 있음 나타내고 있으며, 또 그녀의 교만하고 호색한 표정에서 그녀의 총애를 받고 있는 고도이와 불륜관계에 있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라는 것을 간접으로 표현한 듯이 보인다. 그러나 왕비가 어린 남매를 양 옆에 데리고 있는 모습은 그녀의 부드러운 면을 분명하게 드러내준다

화면에서 얼굴을 돌리고 있는 왕족은 누구인지 알 수 없으나 왕가의 평온하지 못함을 드러내 조화나 온화함보다는 어딘지 모르게 어둡고 불편한 관계에 있음이 표현 되었다.

[3L]그림 3. 고야 작: ‘카를로스 4세의 일가’ (1800) 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

이렇듯 등장한 모든 사람의 특색을 외양뿐 아니라 내면까지 꿰뚫는 탁월한 통찰력과 날카로운 비판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보통 궁정화가가 왕가의 초상을 그릴 때에는 그들의 입맛에 맞게 아름답고 화려한 모습으로 그리게 마련인데 고야는 오히려 화가의 붓을 무기로 권력자의 무능과 타락을 여실히 드러내 보였다.

왜냐하면 당시 세간의 소문은 왕비가 낳은 자식들의 반은 왕의 혈통이 아니라할 정도로 왕비의 불륜에 대해서는 질타의 소리가 높았다. 아는바와 같이 고야도 ‘걸어 다니는 페니스’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여자관계가 복잡했지만 그는 수석궁정화가로 왕에게 충성을 맹세했기 때문에 오히려 이런 사실을 은근히 표현하는 것이 왕에 대한 충성이라 생각하였던 것인지도 모른다.

고야는 이 그림에서 왕실 가족과 같은 공간에 자기 얼굴을 넣었지만, 그의 얼굴은 그들로부터 두어 걸음 뒤로 물러나 어두운 그림자에 반쯤 잠겨 있다. 그러면서 그는 황금과 영광이 지배하는 화려한 무대에서 옆으로 비켜나 냉정하고 무표정하게 권력의 허상을 바라보고 있는 자신을 표현 하였는지도 모른다.

이 그림을 본 왕실의 가족들이 불경죄로 그를 처벌하지 않은 것이 다행스러울 정도다. 하지만 그들의 아둔함은 자신들의 초상을 풍자적으로 묘사하고 있다는 것조차 알아차리지 못하고 왕족들은 이 그림을 좋아했으며 정치적 격동기에 왕가의 힘을 증명하는 그림으로 생각했다.

[4L]그림 4. 고야 작: 그림 3의 부분 확대, 마리아 루이사 상

다시 마하의 그림으로 돌아와서 고야의 ‘마하’ 그림은 당시 재상이었던 고도이의 비밀그림 진열실에 숨겨져 있어 결코 그 모습을 드러낸 적이 없었지만 그림이 너무나 선정적이기 때문에 이를 본 한 두 사람들의 입을 통해 소문은 삽시간에 스페인 전역으로 퍼졌다. 그림에 대한 소문이 걷잡을 수 없을 만큼 되자 당황한 종교 재판소는 고야를 소환해 음란한 그림을 그리게 된 동기와 모델의 신원을 물었으나 고야는 철저하게 입을 다물고 죽을 때까지 입을 열지 않아 모델을 둘러싼 갖가지 추측을 불어 일으켜 전술한 바와 같이 처음에는 명문귀족의 알바 부인이라 추측하였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림의 여인이 재상인 고도이의 애인인 페피타 츠도우(Pepita Tudo)라는 설도 나오게 되였다. 왜냐하면 당시 최고의 세력가인 고도이의 누드 컬렉션에 포함되어 있다가 후세에 알려진 것으로 고도이가 이 작품의 최종 소장자였다는 사실과, 그림의 여인이 페피타와 닮아서 대단한 호색한이었던 고도이가 자기의 애인의 나체를 그리게 해서 이를 응접실에 걸어놓고 즐겼다는 것이다.

남이 보는 앞에서 옷을 벗는 여인의 태도는 어색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마하의 시선은 매우 날카롭고 결코 남이 시킨다고 해서 호락호락 움직일 여자 같지는 않아 보이는 제법 당돌한 여자같이 보인다. 그러나 남자 앞에서 알몸으로 포즈를 취하고 있기 때문에 표정은 사뭇 도발적이지만 몸의 자세가 어딘지 모르게 어색해 보이는 면이 있어 알바부인 보다는 페피타의 태도에 가깝다는 것이다.

고도이가 이렇게 옷을 벗은 상태와 옷을 입은 상태의 두 그림을 그리게 한 것은 그림의 앞쪽은 옷 입은 마하로, 뒤쪽은 옷 벗은 마하로 붙인 다음, 벽을 밀어서 한 바퀴 돌게 만들어 평시에는 옷을 입은 그림을 걸어놓고 있다가도 쉽게 옷 벗은 장면이 나타나게 해서 혼자서는 옷을 벗은 장면을 즐기다가도 방문객이 오면 벽을 밀어서 옷 입은 장면으로 전환 시키고, 만일 친한 사람들끼리 여인의 나체를 즐길 사이라면 옷 벗은 쪽으로 돌려 관음욕(觀淫慾)을 만족 시켰다는 것이다.

이렇게 나체화를 즐긴 것은 비록 스페인의 고도이만이 아니라 당시 유럽 각 나라의 타락한 고관대작들의 집에는 비밀 방을 만들어 놓고 끼리끼리는 관음욕을 만족하는 것으로 즐겼다는 것이다. 이를 증명하는 예로서 독일의 문호 괴테가 스페인에 있는 자기친구로부터 받은 편지에 <스페인에서는 유명한 화가들이 그린 여인의 나체화가 어두운 방에 놓여 있다가 친한 사람이 오면 보여주건 한다.>라는 편지내용을 공개한 것이 있다는 것이다.

마하 그림이 고도이의 누드 컬렉션에 있었던 것은 알바부인이 사망한 후 고도이가 알바부인 댁의 그림을 모두 몰수하였기 때문이며 마하 그림의 출처는 알바부인 댁이라 하여 마하 그림의 주인공은 알바부인이라고 주장하는 이도 있었다고 한다.

[5L]그림 5. 로페쯔 작: ‘페피타 츠도우의 초상’ (1805) 마드리드, 나자로 갈데아노 미술관

문제가 되였던 페피타는 고도이의 애인으로 지내다가 고도이가 실각되고 망명할 때 함께 따라가 1819년까지는 로마에서 지내다가 고도이의 정식부인이 사망하자 입적하였고, 그 뒤로는 파리로 옮겼으며 생활이 빈곤해지자 페피타는 고도이가 마드리드에 숨겨놓았던 재산을 몰래 처분하는 역할을 하였다고 한다. 화가 로페쯔(Vicente Lopez 1772-1850)가 그린 ‘페피타 츠도우의 초상(1805)’을 보면 마하와 유사한 점이 있으나 사진이 아니라 그림이기 때문에 단정할 수는 없다는 견해가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