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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어머니의 모든 것 :어머니는 죽지 않는다

  • 입력 2013.08.07 11:57
  • 기자명 김상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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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는 무엇으로 사는가
스페인 출신의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이 만든 <내 어머니의 모든 것>이란 영화가 있다. 이 영화의 주인공인 마뉴엘라<세실리아 로스 분)는 예전에는 연극배우였으나, 현재는 병원의 장기이식센터에서 일하고 있다. 하지만 그녀에게 유일한 혈육인 아들이 연극배우의 사인을 받기 위해 뛰어가다 자동차 사고로 뇌사상태에 빠지게 된다. 마뉴엘라는 힘든 결정을 내리게 된다. 아들의 장기를 다른 사람에게 기증하기로 말이다.
그녀는 자신의 직장을 그만두고 바르셀로나로 돌아간다. 과거 마뉴엘라는 강압적이고 폭력적인 남편을 피해 뱃속에 아들을 가진 후 오래 전에 바르셀로나를 떠나왔었다.  그녀가 결정적으로 남편의 곁을 떠난 것은 남편의 폭력적인 태도뿐 아니라 남편이 게이이며, 유방확대술까지 할 정도로 여성이 되고자 하는 집착 때문이었다. 바르셀로나로 돌아왔지만, 예전보다 상황이 좋아진 것은 하나도 없었다. 남편인 롤라는 에이즈를 앓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수녀 로사(페넬로페 크루즈 분)와 성관계를 가지는 바람에, 로사는 에이즈와 아기를 모두 가지게 된 것이다.  로사는 에이즈를 앓고 있어 누군가 돌봐줄 사람이 필요했다.
마뉴엘라는 남편에 대한 미움을 접고, 로사를 돌봐주기로 마음먹는다. 그래서 로사는 마뉴엘라의 도움으로 아기를 낳지만 이내 숨을 거둔다. 마뉴엘라는 아기를 자신이 키우기로 하고, 죽은 아들의 이름인 에스테반을 아기 이름으로 정한다. 영화 속의 마뉴엘라는 아들의 죽음으로 인해 무너지려는 자신을 추스르고, 자신의 고통과 슬픔을 받아들인다. 그녀는 그래서 희망의 싹을 틔울 수 있었다. 인생은 고해의 바다이며 순환의 연속이다. 마뉴엘라는 아들 에스테반을 잃었지만 그 아들의 장기로 인해 몇 사람이 목숨을 구하게 된다. 인생의 아이러니는 어떤 사람의 절망이 다른 사람에게는 또 다른 희망으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마뉴엘라는 자신을 지치게 하고, 슬프게 했던 모든 사람들에게 원한과 분노를 갖지 않으려 한다. 그녀는 원수 같은 남편의 아이를 받아들이고, 아들이 사인을 받기 위해 뛰어가다 교통사고를 당하게 한 연극배우 우마를 돌봐주기까지 한다. 이처럼 그녀는 갈가리 찢겨버린 인생의 자락들을 봉합하면서 자신의 상처도 치유 받게 된다.

결국 인생은 고해의 연속이고 인생에는 우리의 앞을 가로막는 크고 작은 장애물이 존재한다고 미리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마뉴엘라는 아들이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절망 속에 사로잡혀 있지 않는다. 그녀는 어머니이기 때문이다. 영화 속의 마뉴엘라는 대모신(大母神)을 연상시킨다. 모든 것을 품어주고, 모든 것을 받아주며, 자신의 품속에서 모든 것을 양육시켜주는 그런 이미지로 등장한다. 어머니의 사랑은 한계를 짓지 않는다. 또한 힘들여 누구를 사랑하려고도, 안아주려고도 하지 않는다. 그냥 어머니이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감정에 따른 행동일 뿐이다.

또 다른 어머니의 이야기
영화 속의 마뉴엘라에 대한 얘기는 그만하고, 실제로 존재하는 또 다른 어머니를 만나보자.
“도대체 어떻게 하려고 자꾸 그러세요? 저랑 상의 좀 하고 결정하시죠.”
진료실 책상을 마주 보고 앉아 있는 50대 중반의 아주머니는 고개를 숙인 채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다.
계속 나는 그 아주머니에게 화를 내기만 할 뿐이다.
“지난번에도 퇴원시키지 말라고 그렇게 말씀 드렸잖아요.”
한참을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던 아주머니가 힘겹게 말문을 연다.
“그럼 어떻게 해요. 아들이 이번에만 퇴원시켜주면 다시는 가스를 불지 않는다고 약속을 하는데요. 부모 입장이 돼서 정신과 병원에 계속 입원시키는 것도 마음이 아프고, 아들이 하도 절실하게 얘기하는 바람에 하는 수 없이 퇴원에 동의를 했습니다. 선생님한테 혼날까봐 이번에도 퇴원시켰다는 얘기도 하지 못했어요. 그런데 이번에도 나가자마자 방 안에 틀어박혀서 부탄가스만 불어대고 있는 거예요. 처음에는 몰랐는데, 침대 밑에서 빈 깡통이 몇 개 나오길래 의심을 했는데, 이제는 아예 나 몰라라 하고 불어대니 속이 터집니다. 어떻게 다시 입원을 시켜야겠지요?”
그 아주머니, 아니 내가 담당했던 젊은 남자의 어머니는 이런 얘기를 하고 계속 눈물만 흘리고 있을 뿐이다.
여기서 제일 좋은 방법은 심각하게 중독된 부탄가스와 환자를 격리시키는 것밖에 없다.
하지만 이 마음 약한 어머니는 그 동안 아들을 입원시키고는, 면회가 시작되어 아들을 만나게 되면, 아들은 항상 어머니에 매달리면서 다시는 가스를 불지 않겠다고 눈물을 흘리고, 무릎을 꿇고 다짐을 한다. 그럼 어머니는 결국 퇴원동의서에 도장을 찍고 마는 것이다. 그것도 벌써 3번씩이나 말이다.
이 젊은 남자 환자는 가스중독이 되기 전부터 우리 의원에 내원했던 환자였다. 사회공포증, 남들 앞에 자신을 노출시키는 것을 극히 꺼려하는 질환을 가진 것이다. 여러 사람 앞에서 얼굴이 빨개지고, 말이 떨리고, 친하지 않은 사람과 식사를 같이 하면 손이 떨려서 음식을 집지 못할 정도로 심한 사회공포증을 앓고 있었다. 환자는 경험적으로 술을 마시면 이런 증세가 일시적으로 없어진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모르는 사람과 만나기 전 술을 한 병정도 먹고 나가거나, 모임이 시작되면 얼른 술을 시켜서 급하게 술을 마시고 자신의 불안 증세를 없애게 되었다. 모든 중독물질에 대한 탐닉은 더욱 강한 중독물질을 찾게 된다. 그래서 찾은 것이 부탄가스였다. 그는 지방에 있는 여자 친구 집에 기거하면서 하루 종일 부탄가스 5~6통을 부는 것이 일과였다.
그래도 어머니에게 이 환자는 3남매 중 막내이면서 가장 정이 많고 어머니를 생각해주는 아들이기도 하다. 그리고 환자가 5살도 되지 않아 남편이 사망하는 바람에 아버지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랐다고 생각한 어머니는 더욱 이 막내아들에 대한 사랑과 연민이 각별하다.
아들은 이 어머니에게 가장 사랑스럽지만 또 한편으로는 그만큼의 실망과 절망을 안겨준 아들이기도 하다. 가스에 취해서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하는 아들을 정신병원에 강제로 입원시키고 집으로 돌아가는 어머니의 심정을 누가 헤아릴 수 있을까?
그런 어머니의 아픔은 아무런 보상도 받지 못하고, 아들은 퇴원 후 반복되는 부탄가스 중독의 길로 들어섰고, 그때마다 어머니는 우리 의원에 내원해서 상의를 하곤 했다.

마음 약한 어머니의 후회
친척도 별로 없는 환자의 어머니는 혼자 힘으로 입원을 시킬 수 없어, 이번에는 사람을 사서 아들이 내려가 있는 부산으로 또 향하게 되었다. 얼마 후 어머니로부터 아들을 입원시켰다는 전화를 받았고, 나는 절대로 의사선생님 지시 없이는 퇴원시키지 말라는 당부를 몇 번이나 했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내 당부는 허사로 끝나고 말았다. 2주 후 어머니는 자신의 약을 타러 내원하게 되었다. 사실 남편과 일찍 사별하고 온갖 돈이 되는 일이란 일은 다하며 평생을 살았으니, 어머니에게 화병이 비켜갈 리가 없다. 그래서 어머니도 우리 의원에서 몇 년 전부터 진료를 받고 있었다. “어떻게 아드님은 병원생활 잘 합니까?”
거짓말을 잘 하지 못하는 어머니의 표정이 금방 굳어진다. 나는 이번에도 아들의 간청에 못 이겨 조기퇴원을 시켰다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벌써 아드님을 퇴원시키셨군요.” “이번에는 정말 아들이 절대로 가스를 불지 않는다고 했어요. 저는 이제 마지막으로 아들을 한번만 더 믿기로 했어요. 선생님 죄송해요. 우리 아들 약은 선생님이 지어주세요. 전에도 계속 다녔으니까요.” 나는 아무런 대꾸를 하지 않음으로써 내 속상한 심기를 표현했다.
하지만 아들은 우리 의원에 오는 일이 없었고, 어머니가 자신의 약을 타러 오는 날 아들의 약을 타가곤 했다.
아들은 4번째 퇴원 후 곧 태국의 푸켓에 가 있었던 것이다. 이 환자는 자신의 증세로 인해 20대 초반부터 외국에 나가는 일이 많았다. 모르는 외국 사람들과 뒤섞여 있으면 증세가 덜 나타나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외국에서 떠돌다 돈이 떨어지면, 우리나라에 들어와 몇 달을 지내다 나가는 일이 많았다. 사실 그 환자에게 돈의 여유가 있는 것이 아니었다. 게다가 어머니는 생활보호대상자로 한 달에 10~20만원 나오는 돈으로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 돈을 쪼개서 어머니는 아들을 외국에 보냈던 것이다. 여비만 마련해주면 아들은 외국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곧잘 생활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