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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 고호 展’에 가다

  • 입력 2013.04.14 16:01
  • 기자명 최 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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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시장 앞에서 필자날씨가 좀 풀린다? 싶었는데 서울 아침기온이 영하 17도란다 . 녹았던 한강물이 다시 꽁꽁 얼어버렸다. 2월 4일 입춘도 가고 글자 그대로 봄이 오고 있는데 전국적으로 12년 만에 폭설이 오고, 입춘대길(立春大吉) 이 아니라 입춘대설(立春大雪)로 매스컴도 야단이다. 뒤를 이어 무서운 한파와 폭설이 몰려오고 있다. 음력설 연휴동안 고향 찾아 떠나는 사람들이 걱정이다. 마음은 벌써 봄을 재촉하고 있는데 도시 날씨가 뒤죽박죽 아직도 마지막 동장군이 발악을 하고 있는 건가? 연휴 마지막 날도 서울은 영하12도 매서웠다. 이런 추운 날은 집에 있어야 하는데 이러다가는 영영 놓칠 것 같다. 예술의 전당에서 하는 ‘반 고호 展’이 내 마음을 끌어당긴다.

지난번 ‘바티칸’박물관전에도 날씨가 추웠고, 학생들로 초만원이였는데 오늘 연휴 마지막 날도 입장객으로 장사진이다. ‘반 고호’전은 2007년 한국일보사 주최로 소개 되었고 간간 유럽 미술전시에서 꼭 등장하는 단골 메뉴이다.
‘빈센트 반 고호(1853-1890)’는 네덜란드의 Zundert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고, 세느·고갱과 더불어 가장 뛰어난 후기 인상파 화가이다. 그는 천재성과 광기가 어우러져 자신의 삶을 그림과 맞바꾼 화가, 아니 그림은 곧 그의 삶이며 삶은 곧 그림이였다고 한다. 짧은 삶을 자살로 마감하여 애절함을 우리에게 더더욱 남기고 간 화가이다.

그의 특별한 인생의 여정, 슬픔과 기쁨, 가난과 좌절, 고통과 인내, 멸시와 천대 속에서도 독창적인 예술혼을 우리에게 보여주었고 오늘날까지 깊은 감동으로 우리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자신의 영혼을 불사르던 10년 동안 800여장의 많은 그림을 그렸다. 그 10년 중 후반 그가 파리에서 보낸 2년 기간이 가장 중요한 인상주의의 새로운 화가로서 자신만의 화풍을 창조한 시기였기에 이번 전시회의 뜻이 있다고 한다.
‘반 고호’는 자신이 화가가 되기로 한 이전에도 제도권내의 미술교육에 대하여 회의적인 입장이였었다고 하며, 어떠한 제도나 표본에 구속되지 않고 순수하여야 한다는 것 즉 대상에 대하여 느낌 그대로 그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여인의 초상(1885년) : 거칠지만 힘찬 느낌을 주는 화풍▲ 여인의 초상(1885년) 인본주의의 색채를 띤 도시 노동자와 농민의 삶을 그린 어두운 색채를 선호했다.예술가는 그리고자하는 풍상을 베낀다기 보다는 재창조한다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뉘넨에서 부모님과 함께 살았던 1884년 초기에 진지하게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는 그 시절 색깔, 톤, 명암의 대비를 익히기 위하여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초기에는 바르비종파를 흠모한 것도 사실이지만 그와 동시에 헤이그파의 어두운 색상의 조화도 함께 추구하여 다소 인본주의적인 색채를 띤 화가로 도시 노동자와 농민의 칙칙한 삶의 어두운 화풍을 즐겨 표현하였다.

조심스럽고 부드러운 그림보다 가공하지 않고 거칠지만 힘찬 느낌을 작품 속에 구현하기를 원했다. 사실주의의 화풍이 후반에 이르러 점점 부드러워지기 시작해 갔다. 그의 검고 어두운 그림들이 철저히 화랑가에서 외면당하였다.
그동안 헌신적인 동생한테 생활을 의지하였으나 더 이상 부담 할 수 없음을 깨달고 회화의 기법에 고집스럽게 해왔던 화풍을 좀 더 자유롭게 재구성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으로 현실과 타협하는 그의 그림에 변화를 시도해 갔다.

 레오니 로즈 샤르뷔다비의 초상(1887년) : 물감은 색을 풍부하게 사용하고 활용했다. 점성이 있는 물감을 섬세하게 덧발랐다.화병에 담긴 카네이션(1886년) : 빛을 머금은 밝은 색을 화풍에 거침없이 사용하기 시작했다밝은 색을 작품에 활용하고 빛을 먹음은 화사한 살아있는 색감, 거침없는 붓놀림과 강열한 색채는 무겁고 긴장감마저 주고 있으며 그의 그림들은 압축된 에너지를 내포하고 있었다. 자신만의 고집을 꺾고 시류에 편승한 그림도 그려 보았다. 허나 이런 행위에도 그를 가난에서 벗어나게 하지는 못했고 현실은 그의 그림에 냉담했다. 짧은 파리 기간은 현대성을 표현한 모더니스트로 변해가는 과정이였다.
프랑스 남부의 작열하는 태양의 색채와 거친 붓놀림, 그의 영혼의 소리를 예술로 승화시켜 독창적인 화법으로 파리 생활은 제2의 ‘고호’가 탄생하는 과정을 선보이고 있었으며 특정시기를 다룬 테마전이였다. 이번 전시에 특이할만한 것은 ‘반 고호’의 자화상이 많이 등장 한다. ‘반 고호’의 자화상이 그의 생애를 통하여 전부 36점으로 추정되였는데 파리시기에 27점을 그렸다고 하며 이번 전시회에 그중 무려 9점을 내여 놓았다. ‘고호’의 생활 중 너무 가난하여 모델을 구할 수 없어 여러 사람의 표정에서 우러나오는 삶의 실상을 그리지 못해 주로 자화상을 많이 그렸다.
자화상의 그림 속에 주변 사물을 생략하고 반복적인 그림 속에서 자신의 내면과 외면의 감정을 충실히 표현해갔다. 많은 연습을 통해 색의 다채로운 활용과 붓 터치에 있어 새로운 가능성을 찾았다. 빈곤한 생활의 타계책으로도 인물화에 가까운 초상화의 주문도 기대 할 수 있었으나 주문 의뢰는 단 한 점도 없었다. 이러한 작품 판매의 부진으로 경제적인 악순환이 그의 자조적인 한탄과 좌절로 이어져 갔다.

고호는 다양한 자화상을 그렸다본 전시는 파리시기의 작품들을 통하여 동시대의 미술연구에 대한 것들을 분석 비교 할 수 있다. ‘고호’의 그림에 대한 기반을 만들어낸 시기이며 그의 깊은 예술적인 고찰과 천재성을 볼 수 있다. ‘고호’에 대한 연구는 비단 그의 작품 속에서만 찾는 것이 아니라 작품 이면에 그의 숨겨진 처절한 삶과 인간적인 고뇌에서도 읽을 수 있다. 짧은 파리시절의 급격한 화풍의 변화에 다양한 테마설정이 그의 그림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고 있다.
그는 파리 2년 생활을 뒤로하고 평생 많은 작품을 남기고도 단 한편만 팔았던 불운의 화가이며 그의 예술 세계는 전혀 이목을 받지 못한 불행한 삶을 살았다. 파리 시골 근처에 내려와 이따끔 재발하는 환각 증세와 신경질환으로 정신병원을 들락거리다가 결국 권총 자살로 불우한 생을 마감했다.
그가 죽은 후 그의 명성은 급속히 알려지기 시작했다. 이 고갱 전을 보고나오면서 우리나라의 박수근 화백과 이중섭 화백의 생존에 가난과 불우했던 그들의 삶을 생각하며 불멸의 위대한 화가들의 일생은 서로 일맥상통하는 것 아닌가 싶다. 현재도 우리나라의 미술학도들도 미래의 아니 제2, 제3의 고갱과 같은 삶을 살고 있으리라 추측하고 어느 시대간에 가난한 화가들을 위하여 숨은 훌륭한 독지가의 아쉬움을 생각해 보며 씁쓸한 마음 안고 전시장을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