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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금희가 부른 국내 최초 댄스가요 ‘키다리 미스터 김’

  • 입력 2016.07.18 17:01
  • 기자명 왕성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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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곡가 황우루 제의로 마지못해 취입한 데뷔곡으로 대박 나
키 작은 박정희 대통령 의식해 1년간 방송금지곡 묶이기도

황우루 작사·작곡, 이금희 노래의 ‘키다리 미스터 김’은 트위스트 리듬으로 매우 흥겹다. 1960년대 젊은이들로부터 폭발적 사랑을 받았던 국내 최초 댄스가요다. 이금희(본명 이대금, 1939년~2007년 2월 20일)가 1966년 발표한 이 노래는 공전의 히트를 기록, 국민가요급 곡으로 지금도 올드팬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키다리 미스터 김’은 트위스트 열풍을 몰고 오며 전쟁의 포화를 딛고 일어서려는 국민들에게 용기와 즐거움을 줬다. 한명숙의 ‘노란샤쓰의 사나이’, 현미의 ‘밤안개’와 함께 신드롬을 일으키며 그 시절 팬들 기억 속에 깊이 각인됐다. 흥겹고 코믹한 가사가 인상적이며 선풍적 인기를 모았다.

이금희, 우리나라 ‘댄스가수 1호’
이 노래는 이금희가 1959년 가수로 데뷔, 미8군 무대에서 인기를 끌자 음악인 황우루 제의를 받고 취입했다. 트위스트 리듬에 맞춰 춤을 추는 이금희는 우리나라 최초 댄스가수였다. 특히 남성들 인기가 대단했다. 미8군 무대, 대학축제, 다운타운클럽에서 주로 외국번안곡을 부른 그녀는 여성 팝 메신저로 1960년대 초 한명숙, 현미와 함께 당대 최고 여가수로 대접받았다. 1963년 이후부터 본격 뜨면서 ‘미스 다이너마이트’란 별명이 붙을 만큼 댄스가수 여왕으로 상종가를 쳤다.

그는 대중들의 인기를 끌자 박춘석을 비롯한 많은 작곡가들로부터 음반취입 제의를 받았다. 어느 날 음악인 황우루가 찾아와 취입을 제의했지만 그녀는 거절했다. 그럼에도 황 씨가 한 달간 졸라대자 어쩔 수 없이 곡을 받아 취입한 게 바로 데뷔곡이 된 ‘키다리 미스터 김’이다. 결과는 대박이었다. 이금희에게 공연, 방송출연이 몰려 목소리 상태가 최악일 때 취입했음에도 빅히트한 것이다. 그는 생전에 언론인터뷰에서 “그렇게 취입한 노래가 나의 대표곡이 될 줄 누가 알았겠느냐”며 그때를 떠올렸다.

김상희가 1974년 리메이크해 히트한 이 노래는 드라마에도 등장했다. 고향의 옛 추억을 떠올리게 한 드라마 ‘황금사과’에서 극중 경숙(이영하)이 군민콩쿨대회에 나가 부르기도 했고 경민이가 다방에서 자신의 홍보용 곡으로 통기타를 치며 부르곤 했다.

‘키다리 미스터 김’에 얽힌 뒷얘기들도 흥미롭다. 노래를 작사·작곡한 황우루는 1966년 노래를 알리기 위해 키가 180cm가 넘는 30여명을 모아 국내 첫 팬클럽을 만들어 화제가 됐다. 1년간 방송금지곡이 된 사연도 있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키가 작아 당국에서 ‘키다리 미스터 김’을 부르지 못하게 한 것이다. 이금희는 이 노래를 취입한 1966년 이미자, 유주용 등과 베트남 비둘기부대 위문공연을 떠나 말라리아에 걸려 죽을 고비를 넘기기도 했다. 악전고투 속에서도 파병군인들을 열광시킨 그녀가 월남군인과 트위스트를 추는 파격적 사진이 외신을 타고 보도돼 화제가 됐다. 1968년 일본 무대에선 방해를 받기도 했다. 동경에서 열린 한일친선공연에 참가하러 출국하려다 심한 반일시위를 경험한 그가 노래를 부르자 현지직원이 마이크음량을 뚝 떨어뜨려 애를 먹은 일화가 있다.

그녀는 또 미8군 가수였던 막내 동생 이금미(본명 이대란)와 ‘이씨스터즈’를 결성, TV방송에 나가 주목받았다. 미8군 무대 스페셜A급 가수로 발돋움한 그는 ‘스프링 버라이어티’ 등 유명 쇼로부터 월 40회 이상 공연예약을 받아 신중현과 무대를 꾸몄다. 161cm, 50kg대의 터질 듯한 몸매에 화끈한 춤을 곁들이며 노래한 이금희는 뭇 남성들 시선을 받으며 무대마다 앙코르세례를 받았다. 그는 생전에 “당시 수입도 대단했지만 옷 욕심이 많아 의상비로 다 썼다”고 회고했다.
‘이금희가 팝송을 부르면 바로 히트 한다’는 말이 나돌며 가요계 핵폭탄으로 떠오르자 그에게 시샘의 눈길이 쏠렸다. 클래식창법을 비난하는 소리가 높아진 것이다. 그는 비난을 이겨내기 위해 목청을 혹사하며 피나는 노래연습을 하면서 허스키보컬이 됐다.

이금희는 ‘키다리 미스터 김’이 실린 데뷔음반 발표 후 ‘둘이서 살짝 쿵’, ‘날씬한 아가씨끼리’, ‘용꿈’, ‘그것 참 별꼴이야’, ‘나는 말괄량이’, ‘치맛바람’, ‘두 줄기 길’, ‘작은 새’, ‘다이애나’, ‘아이 참 속상해’ 등 히트곡을 내면서 정상의 인기가수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1960년대 중반까지 전성기를 누렸던 그는 가수의 길을 오래 걷지 못했다. ‘키다리 미스터 김’ 발표 직전인 1965년 결혼한 그는 두 번이나 유산하는 고통을 겪었다. 심한 충격을 받은 그는 셋째 번 임신으로 딸(윤정)을 가져 1969년 MBC-TV 개국 쇼 출연을 끝으로 가요계에서 자취를 감췄다. 연예활동보다 딸을 위해 평범한 어머니 길을 걷기로 한 것이다. 다만 최희준, 위키리, 한명숙, 현미 등 인기가수들 친목모임인 ‘60회’와 ‘매미회’엔 나가 친분을 가졌다.

딸의 학교모임에 전념한 채 애완동물을 기르며 소일하던 이금희는 1977년 이혼의 아픔을 겪었다. 이후 1984년 호텔디너쇼에 간간이 모습을 드러내다 1987년 7월 KBS-1TV ‘가요무대’로 컴백했다. 이후 TV, 라디오프로그램 출연과 해외교포 위문공연으로 동포들 망향의 슬픔을 달래줬다. 결혼 후 불어난 몸무게를 줄이며 재기의욕을 보인 그는 1998년 신곡과 리메이크 곡을 담은 CD를 내고 서울 정동극장에서 한명숙, 최양숙, 권혜경 등 왕년의 인기가수들과 공연도 했다. 우리나라 최초 팬클럽을 가지며 화끈한 율동의 댄스곡들로 1960대를 춤바람 열풍지대로 몰아넣은 ‘한국 최초 댄스가수’ 이금희는 김추자, 김완선, 김현정 등 후배댄스가수들 탄생에 자양분을 준 선구자였다.

경남여중 2학년 때 오현명 레슨
이금희는 독립운동가 할아버지 때문에 1940년 9월 15일 평북 선천에서 목회생활과 사업을 했던 아버지 이득성과 어머니 임순도의 3남3녀 중 다섯째로 중국 상해서 태어났다. 1945년 해방이 되자 온 가족이 서울로 이사해 남산초등학교에 입학했지만 통역원으로 일했던 큰오빠(이대삼)가 살던 대전을 거쳐 부산에 살았을 만큼 어린 시절은 시대 아픔과 궤를 함께 한 유랑의 세월이었다. 경남여중 2학년 때부터 음악선생이었던 오현명의 레슨을 받으며 성악가 꿈을 키우던 클래식학도였다. 경남여고시절 학생회 대대장과 합창부장을 했던 그는 여고3 때 부친의 위암수술로 가세가 기울자 서울음대 진학을 포기하는 좌절을 겪었다. 그러던 중 부산에 온 박단마 ‘그랜드 쇼’를 친구와 몰래 구경 갔다가 스타가수들 노래에 빠지며 인생이 바뀌었다. 현인 노래가 너무 좋아 대학은 못 가도 그런 노래를 할 수 있다는 희망이 들면서 가수가 되려했다. 아버지의 반대는 대단했지만 어머니와 큰오빠가 적극 도와줬다. 큰오빠 친구인 인기가수 송민도가 부산에 오자 아버지 모르게 보따리를 싸들고 무작정 상경 했다. 송민도 소개로 KBS방송 악단장인 그의 동생 송민영을 찾아갔다. 즉석 노래 테스트에서 팝송가사를 시원한 목소리로 노래하는 그녀에게 반한 송민영의 도움으로 KBS라디오 쇼프로그램에 출연, 당대 최고 인기가수들 틈에 끼어 팝송번안곡 ‘동창이 밝았네(It’s almost tomorrow)’를 부르며 엉겁결에 가수가 됐다. 그는 미8군 무대에서 유명했던 베니 김(본명 김영순) 눈에 들어 ‘뉴스타 쇼’에 출연하며 미8군 가수로 자리 잡았다. 폴앵커와 엘비스 프레슬리 곡들과 ‘싱싱싱’, ‘바나나 버트송’, ‘비빠빠 룰라’ 등 외국 번안곡을 불러 인기를 얻었다. 그처럼 잘 나갔던 그는 2007년 2월 20일 뇌출혈 합병증으로 세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