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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갈·달리·뷔페 展’에 가다

  • 입력 2016.09.20 17:18
  • 기자명 최 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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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다른 해보다 유별나게 덥다. 7월 말 주일인데도 이제부터 본격적인 더위가 시작하는 판인데 아침부터 한낮 같이 숨 막힐 정도의 무더위다. 예술의 전당에서 6월 25일부터 9월 25일까지 ‘샤갈·달리·뷔페 전’을 한다고 매스컴이나 지면을 통하여 알고 있어 오전 중에 나섰다.

20세기 모던 아트의 거장 ‘마르크 샤갈·살바도르 달리·베르나르 뷔페’는 한국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사랑 받는 화가로서 각자의 이름으로 하나의 독자적인 스타일을 의미 할 만큼 20세기 미술사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점하고 있는 거장들이다.

20세기는 설명 할 수 없을 만큼 다양한 미술 장르가 화려하게 꽃을 피었던 미술사적 황금기이다. 그 중에서도 자신만의 개성을 자랑했던 3인의 거장들이, 한데 어우러져 동시에 20세기의 미술의 다양성을 이들을 통해서 볼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준 주최 측에 먼저 감사를 드린다. 작품들 내용은 이들의 삶과 영감을 공감 할 수 있는 주제로 나누어 전시 했다고 한다.

이들 거장과 거장들, 이름만 들어도 설레는 화가들의 조합, 거친 세대의 격랑 속에서도 사랑을 노래한 ‘샤갈’, 천재라는 수식어가 가장 적합한 ‘달리’, 20세기의 나이에 피카소의 대항마로 떠올랐던 ‘뷔페’가 한자리에 만나 그들의 작품을 감상하는 마당이다.

마르크 샤갈 그는 두 차례의 세계대전, 러시아 혁명 등 수난의 역사 속에서도 수많은 좌절을 경험했지만 그의 작품들은 꽃과 동물, 연인들이 자유롭게 등장하며 생명력이 넘치는 색채는 환상적인 배경 속에서도 기쁨을 노래하고 있다.

샤갈의 고향 러시아시절에는 유태인 신분으로 미술수업을 받았고 파리 시절에는 이름을 프랑스 이름인 마르크 샤갈로 바꾸고 프랑스로 귀화하였고 독자적으로 미술 수련을 지속하고 전쟁과 러시아 혁명으로 고향으로 다시 돌아가 공산당의 박해로 모스크바로 이동하여 극장 간판을 그리며 연명하였다.

프랑스와 미국의 2차 대전이 발발하여 뉴욕으로 도피하여 전쟁이 끝나 파리에 정착 하게 된다. 율법을 든 유대인의 그림은 샤갈의 고향인 비테프스크는 정통적인 하시디즘 유태교인 모든 사람과 사물에 대한 사랑 그리고 그것을 통한 신의 사랑을 강조하는 신앙은 샤갈의 예술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살바도르 달리는 그의 인상과 같이 커다란 눈까지 치솟을 것 같은 콧수염, 속내를 알 수 없는 달리의 기념비적 표정에는 광기와 영리함이 중첩 되었다. 그의 기행은 미술계의 논란거리였지만 기발한 아이디어와 예술적 성취를 부인 할 사람은 없다. 본 전시의 유화, 과슈, 판화, 조각, 가구 60여점은 그의 천재성을 확인 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이다.

무의식의 세계를 탐구하고 기이한 상징 이미지를 그려내며 특이한 행동을 일삼는 달리는 광인으로 오해받기 충분하다. 나는 미치지 않았다고 그는 외치고 있으며 이를 이해하기 위하여 달리의 어린 시절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먼저 하여야할 것이다.

그는 스페인 카탈루냐지방의 부유한 공중의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형의 죽음으로 형의 이름을 물려받아 집안에서 죽은 형의 그늘 속에 정체성의 혼란을 겪으며, 신경 증세가 있는 아이로 성장 했으며 살아있는 자기를 증명하기 위하여 존재를 표출하여야 했고 수시로 돌출행동을 했다.

그는 어머니의 뱃속에 있었던 기억을 탐구하며 이를 잃어버린 낙원이라 칭하고 이러한 무의식의 기억과 매몰찬 아버지에 대한 두려움은 그의 창작근원이 되었다. 달리의 독특한 가장 유명한 것이 바로 녹아내리는 시계일 것이다.

시간은 일반적으로 고정되어 있다고 하는 통념과 다르게 시간은 그리 엄격하지는 않다. 집중하고 있거나 유쾌한 일을 하고 있을 때 시간은 빠르게 흐르지만 지루하고 불편한 상황일 때, 시간은 느리게 흐른다는 것이다. 달리는 시간은 우리 인간의 무의식속에 조작되거나 변화하며 불합리하게 흐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표현으로 시계를 흐느적거리게 만들어 놓았다. 시간의 속도는 오로지 우리에게 달렸다고 한다. 그래서 우주의 리듬에 맞추어 춤추는 시계를 만들었다. 이 작품은 자신과 시간의 한계를 표현했다고 한다.

베르나르 뷔페는 1928년 태어나 파리 북부 바티뇰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가정에 소홀한 아버지 밑에서 자란 뷔페는 우울한 유년기를 보냈다. 그가 예술가로 자라날 수 있었던 것은 어머니의 공이 컸다. 아들의 미술에 대한 재능을 보고 어머니는 아들하고 루브르 박물관에서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15세 나이에 에꼴 데 보자르는 프랑스의 국립 고등 미술학교 중 가장 유명한곳으로 드가, 르누아르 등을 배출한 프랑스 명문학교를 다녔고 젊은 나이에 미술계에 데뷔하여 다양한 작품을 내 놓았고 파리의 미술 비평가들에 주목을 받았다. ‘미술이 세상을 즐겁게 할 필요는 없다’고 했다.

삭막하고도 쓸쓸한 풍경, 메마른 사람들, 거친 선으로 이루어진 뷔페의 그림에서 따뜻한 온기는 없다. 2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미술이 현실에 아름다운 화장으로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는 것이 아니라 가감 없이 시대를 직시해야한다고 했다. 그림 교외에서 보여주는 것은 어린 나이에 2차 대전을 겪은 황량함과 비참함을 표현한 대표적인 작품이다.

오늘 이 전시는 미술전시 그이상의 소득이었다. 거장과 거장, 20세기의 미술의 격전지를 보고 나오면서 주최 측의 노고에 감사함을 보내며 전시장을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