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부처님 가르침 상징적 표현한 ‘성불사의 밤’

  • 입력 2016.12.23 10:14
  • 기자명 왕성상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1932년 북한 정방산 기슭 성불사(북한국보 31호) 배경
이은상 작시, 홍난파 작곡…‘우리나라 가곡 최고봉’ 꼽혀

이은상 작시, 홍난파 작곡의 가곡 ‘성불사의 밤’은 1932년 북한에 있는 사찰 성불사(成佛寺, 북한국보 31호)를 배경으로 만들어진 유절가곡(有節歌曲, 절마다 같은 멜로디가 되풀이되는 노래)이다. 깊은 밤 산사(山寺)에서 느끼는 나그네의 고독하고 애절한 마음을 읽을 수 있다. 반주의 음형은 펼친 화음형태며 주요 3화음으로 이뤄졌다. 선율의 오르내림이 적고 조용한 흐름이 이어지다 끄트머리 대목에서 높아진다. 겉으로 드러난 것보다 내적으로 쌓인 감동을 불러일으킨다. 남성성악가, 그 중에서도 낮은 음의 바리톤이나 베이스가 불러야 제격이다.

1933년 ‘조선가요 작품집’ 통해 발표
이 노래는 1933년 작곡가 홍난파 가곡작품들을 묶은 ‘조선가요 작품집’을 통해 발표됐다. 시조시가 노랫말로 쓰여 이채롭다. 작시자(作詩者), 작곡자가 절에서 느낄 수 있는 적막감을 혼연일체가 된 듯 잘 담아낸 곡으로 우리나라 가곡의 최고봉이라 할만하다. 홍난파가 미국유학 때인 1932년 노산 이은상의 시조가 마음에 들어 작곡했다고 전해진다. 이은상이 성불사를 찾은 건 29살 때인 1931년 8월 19일이다. 이화여전(현재 이화여대) 교수시절 벗들과 정방산(正方山, 481m, 일명 천성산)에 오른 그는 성불사를 돌아보고 그날 밤 청풍루 마루에서 잠을 잤다. 그는 법당 처마 끝에서 들려오는 댕그랑거리는 풍경소리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때의 고적한 감동을 담은 시조가 노랫말이 된 ‘성불사의 밤’이다.

정방산은 현재 북한주민들이 자주 찾는 명소가 됐다. 정방산과 성불사의 유물·유적이 복원·보존돼 있다. 1997년 북한정권이 배구장, 농구장 등 체육시설과 낚시터, 잔디밭, 찻집, 식당, 상점, 동물원 등을 만들어 유원지화 했다. 주민편의를 위한 도로 정비, 주차시설 마련은 물론 버스노선도 생겼다. 노래무대인 성불사는 황해북도 사리원시 봉산군 정방산성 안에 있는 사찰로 사리원시 북쪽으로 8km쯤 떨어진 울창한 숲 속에 있다. 우리나라 31본산에 속했던 큰 절이다. 평양에서 자동차로 1시간 거리다. 성불사는 북한지역 사찰 중 가장 오랜 목조건물로 손꼽힌다. 절 입구 살구나무숲이 장관이어서 일제강점기 땐 서울, 평양 등지에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성불사, 역사 가장 깊은 목조건축물
정방산 기슭에 자리 잡은 이곳엔 극락전(極樂殿), 응진전(應眞殿), 청풍루, 명부전, 운하당, 산신각과 4각5층 석탑이 있다. 중심건물인 극락전은 6·25전쟁 때 부서진 것을 되살렸으며, 응진전은 고려 충숙왕 때 세워진 그대로 보존돼있다. 성불사와 고려시대양식으로 추정되는 4각5층 석탑은 북한국보다. 응진전, 극락전은 성불사의 대표건물로 경북 영주 부석사, 황해북도 연탄 심원사 보광전, 평안북도 박천 심원사 보광전 등과 함께 우리나라에서 역사가 가장 깊은 목조건물이다. 고려시대 건물특징인 배흘림기둥에 앞면이 긴 것임에도 균형이 잘 이뤄졌고 아름다우면서도 웅장하다.

성불사는 통일신라 말기(후삼국시대)인 898년(효공왕 2년) 도선국사가 지었다. 이어 고려시대 때인 1327년(고려 충숙왕 14년) 승려인 나옹왕사가 다시 지었다. 그 뒤 임진왜란으로 불 타 없어졌으나 1751년(영조 27년) 중수됐다. 응진전은 고려와 조선시대 양식이 남아있는 게 특징이다. 건물 안은 고려시대 양식이지만 조선시대 때 수리했다. 고려창건에 큰 역할을 한 나옹왕사는 “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고 / 창공은 나를 보고 티 없이 살라하네 / 성냄도 벗어놓고 탐욕도 벗어놓고 / 물 같이 바람 같이 살다가 가라하네”란 시로 유명하다. 도선은 풍수지리설에 의해 서쪽을 외침으로 잘 막도록 성불사를 지었다는 설이 있다. 북한 성불사와 이름이 같은 절이 전국에 여러 곳 있다. 용인시 수지구 포은대로, 안산시 원곡동, 안양시 동안구 경수대로, 하남시 학암로, 수원시 장안구 영화로, 영주시 상망동, 광양시 봉강면, 창원시 진전면 여양리 등지에 있다. 천안시 동남구 안서동 태조산에 있는 대한불교조계종 제6교구 본사인 마곡사의 말사도 성불사다.

노랫말 ‘풍경소리’는 세상 유혹이나 역경
찬불가로도 불리는 ‘성불사의 밤’ 가사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법문(法文)임을 알 수 있다. 성불사는 ‘부처를 이루는 절’이다. 불법을 만나 정진하면 누구나 부처를 이룰 수 있는 도량이므로 이 세상이 성불사란 의미다. ‘성불사의 밤’에서 밤은 중생이 무명 속에 있다는 뜻이다. 가사에 나오는 ‘풍경소리’는 세상의 유혹이나 역경을 말한다. 풍경이 바람을 만나 일어난 풍경소리는 허공에 잠깐 머물다 사라지듯 세상의 모든 것은 인연에 따라 나타났다가 인연이 다하면 사라진다. 나그네는 풍경소리에 잠을 자지 못하고 홀로 듣고 있다. 풍경소리가 울려도 언제 그칠까 기다리고 끊어져도 또 들릴까 맘 졸이며 잠을 자지 못한다. 객은 어리석어서 객관세계에 마음이 끌린 나머지 눈을 붙이지 못한다. 세상에 연연하는 자신의 마음을 모르니 잠을 이루지 못하고 괴로워한다는 얘기다. 반면 주승은 풍경소리가 울려도 잘 자고, 울리지 않아도 잘 잔다. 여기서 주승은 지혜로워서 이 세상의 이치와 원리를 모두 터득, 어떤 상황에서도 편하고 자유롭게 살아가는 보살을 일컫는다.

노래가 유명해지자 같은 제목의 영화 ‘성불사의 밤’(Night of Seongbul Temple)도 만들어졌다. 1970년 개봉된 이 영화는 박남주 각본으로 김화랑 감독이 메가폰을 잡고 한국예술영화사가 제작했다. 문희, 신성일, 박병호 등이 출연했다. ‘성불사의 밤’ 노래는 손학규 전 민주당 대표의 애창곡이기도 하다.
노랫말을 만든 이은상은 1903년 경남 마산에서 이승규(李承奎)의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1918년 아버지가 세운 마산창신학교 고등과를 졸업하고 1923년 연희전문학교 문과에서 수업하다가 1925∼1927년 일본 와세다대 사학부에서 청강했다. 1931년·1932년 이화여자전문학교 교수, 동아일보사 기자, ‘신가정’ 편집인, 조선일보사 출판국 주간 등을 지냈다. 1945년 8월 광복 후 이충무공기념사업회 이사장, 안중근의사숭모회장, 민족문화협회장, 독립운동사 편찬위원장, 세종대왕기념사업회 이사, 문화보호협회 이사 등을 역임했다. 시인이자 소설가인 그는 자유시를 썼으나 1926년 시조부흥운동이 본격화되면서 전통문학과 국학에 관심을 갖고 시조를 많이 썼다.

1930년 이후 이병기와 함께 우리나라 대표시조시인으로 자리를 굳히면서 1935년 4월 민요적 리듬을 살린 ‘할미꽃’, ‘봄 처녀’ 등을 발표했다. 1932년에 펴낸 ‘노산시조집’엔 향수·인생무상·자연예찬을 주제로 한 작품들이 실려 있다. ‘고향생각’, ‘가고파’, ‘성불사의 밤’ 등엔 감미로운 서정이 담겨있다. 1945년 광복이후엔 개인의 서정보다 사회적 현실에 바탕을 둔 국토예찬이나 조국분단의 아픔, 우국지사의 추모 등을 읊었다. 평론에도 관심을 갖고 시조이론 관련 글을 많이 썼다. 사학가이자 수필가이기도 한 그는 해박한 역사지식과 유려한 문장으로 국토순례기행문과 선열의 전기를 많이 썼다. 시문집 ‘노산문선’, ‘피어린 육백리’, ‘이충무공일대기’ 등 100여 권의 저서를 남겼다. 1982년 9월 18일 지병인 방광암으로 별세했다.

홍난파, 14곡의 대중가요도 작곡
홍난파(본명 홍영후)는 1898년 4월 10일 남양군 둔지곶면 활초동(현 화성시 남양읍 활초리)에서 남양홍씨 토홍계 대호군공파 24세손으로 8남매 중 셋째이자 차남으로 태어났다. 작곡가, 피아니스트이자, 지휘자로 활동했다. 음악평론가로 활동하면서 ‘한국의 슈베르트’라 불리기도 했다. 그는 1910년 중앙기독교청년회 중학부에 입학, 바이올린을 익혔다. 1912년 조선정악전습소 서양악부 성악과에 들어가 성악을 전공했고 1913년 기악과에 입학, 이듬해 중앙기독교 청년회 중학과 및 기악과를 졸업한 뒤 연주자가 됐다. 고등음악학원 수료 후 도쿄교향악단을 사직, 1929년 귀국해 중앙보육학교 교수를 지냈다. 1931년 미국으로 가 셔우드음악학교에서 연구하고 1933년 돌아와 이화여전 강사, 경성보육학교 교수로 일했다. 1935년부터 ‘백마강의 추억’ 등 14곡의 대중가요를 나소운이란 예명으로 발표하기도 했다.

그의 감미로운 서정성이 가곡에 걸맞아 노래로 태어난 건 ‘성불사의 밤’, ‘가고파’, ‘옛 동산에 올라’, ‘고향생각’, ‘사랑’, ‘봄 처녀’, ‘그 집 앞’ 등이 있다. 조선음악협회 평의원으로 있으면서 이광수 작사의 ‘희망의 아침’을 작곡하기도 했다. 그는 미국에서의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앓았던 늑막염이 도져 1941년 8월 30일 숨을 거뒀다. 1954년 난파기념사업회가 출범해 ‘조선동요 100곡집’이 재간행 됐다. 1968년 수원 팔달공원에 ‘고향의 봄’ 노래비가 건립되고 이듬해 난파음악상도 만들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