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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공수정이 놓치고 있는 진짜 문제들

네덜란드의 위트레흐트 대학병원 의료진이 체외수정 실험실에서 남편이 아닌 다른 남자의 정자를 26명의 여성에게 수정시켰다. 지난 12월 28일 BBC 외신에 따르면, 위 병원은 공식 성명을 통해 2015년 4월부터 2016년 11월 사이 체외수정 과정에서 실수가 있었음을 인정하고, 유감의 뜻을 표하였다고 한다.

이와 비슷한 사건은 싱가포르에서 이미 발생한 적이 있다. 2010년 10월 중국계 싱가포르 여성이 인공수정으로 딸을 낳았는데, 딸의 피부색 등이 자신의 남편과 너무나 달랐다. 이후 알게 된 딸의 혈액형(B형) 역시 부부의 혈액형(A형과 O형)과 맞지 않았다. 

부부는 DNA 검사를 요청하였고, 그 결과 인공수정 과정에서 다른 남성의 정자가 수정된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2012년 딸의 어머니는 병원과 의료진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였다. 싱가포르 언론에 따르면, 그녀는 딸의 양육비를 포함한 일체의 손해에 대해 배상을 요구하였다고 한다. 손해에는 딸이 성년이 될 때까지의 생활비와 아버지의 나라인 독일 유학비용까지도 포함되었다. 

이에 대해 병원 측은 일단 건강한 아기가 태어난 이상 양육비를 포함한 어떠한 손해도 없다고 반박하였다. 2015년 1월 싱가포르 법원은 “태어난 아기로 하여금 자신의 존재 자체가 잘못이나 실수라고 생각하게 하여서는 안 되며,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자라게 할 수는 없다”고 하면서 그녀의 청구를 인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판결에 항소하였고, 2015년 8월 다시 재판이 열렸다. 그녀의 대리인은 부부가 생물학적으로 자기들과 동일한 아기를 원하였는데, 병원의 실수로 다른 남자의 DNA를 가진 아기를 키우게 되었으므로 그 자체가 손해라고 주장하였다. 반면, 병원 측 대리인은 부부가 자녀를 원해 인공수정을 택한 이상 양육비 지출은 이미 예상되었던 것이므로, 생물학적 관련성과 상관없이 부모에게는 손해가 없다고 항변하였다. 싱가포르 법원은 현재까지도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양육비 배상은 인공수정을 둘러싼 논란 중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배우자가 아닌 남자의 정자를 통하여 출생한 아이의 아버지는 누가 되어야 할까. 임신하여 출산한 여자가 어머니가 됨은 의문이 없다. 민법 제844조 제1항에 따라 “처가 혼인 중에 포태한 자는 부의 자로 추정”되므로, 여자의 법률상 남편이 아기의 아버지로 추정된다. 

남편이 사전에 비배우자의 정자를 이용한 인공수정에 동의하였다면 남편이 법적 아버지가 되고, 친생자 관계를 부인할 수 없다. 그런데 싱가포르 사례처럼 병원의 실수로 다른 남자의 정자가 수정된 경우라면 법률상 남편은 친자식이 아님을 인정 해달라는 소(친생부인의 소)를 제기할 수 있다. 그리고 법원은 DNA 불일치를 이유로 남편의 청구를 인용할 가능성이 있다.

우리나라에서 정자 공여에 관해 규정하고 있는 법률은 “생명윤리 및 안전에 관한 법률”이 유일하다. 그런데 이 법률은 정자 공여로 인해 발생하는 법적 지위에 대해서는 아무런 기준도 가지고 있지 않다. 민법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영국은 1990년에 이미 소위 “인공수정과 배아에 관한 법률(Human Fertilisation and Embryology Act)”을 제정하여 남편이 동의하면 남편이 아이의 아버지가 되고 정자 공여자는 어떠한 법적 의무도 부담하지 않도록 하고 있다. 인공수정을 통한 출생자는 해마다 증가하고 있으며, 난자·정자 기증을 활성화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공공정자은행의 설립과 당사자들의 법적 지위를 명확하게 규율할 수 있는 근거 법령의 마련이 시급하다.

 

신영인 기자  emd@mdjourna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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