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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하고 원통해 질투하다 미쳤다

  • 입력 2017.04.12 17:10
  • 수정 2017.06.15 10:57
  • 기자명 문국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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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걸작작품을 남긴 프랑스의 조각가 로댕(Auguste Rodin 1840~1917)은 그의 작품 보다 훨씬 더 많은 여성 편력의 일화를 남겼다. 그중에서도 뜻있는 사람들의 이맛살을 찌푸리게 하는 것은 한 젊은 유망한 여류 조각가를 사랑하고는 헌 신짝 버리듯이 하여 원통하고 분해 정신병자가 되어 반생을 고통을 벗어나질 못하고 헤매다가 세상을 하직하게 하여 만인의 공분을 사게 하는 사실이 있다.

까미유 클로델(Camille Claudel 1864~1943)이라는 조각가 지망생이 공부를 하려고 파리의 에콕 데 보자르라 예술학교에 입학한 것은 그녀의 나이 13세 때이었다. 이 어린 나이에 당시 최고의 예술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아 그녀의 예술적인 재능을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이 학교 교장은 그녀의 재능을 높이 평가해서 당시 최고의 조각가이었던 로댕의 지도를 받을 것을 강력히 추천하였다.

그때의 까미유의 나이는 19세이고 로댕은 42세이었다. 즉 두 사람은 제자와 스승이라는 관계로 만났는데 스승은 제자의 모습을 보고는 모델이 되어 줄 것을 원해 예술을 이해하고 사랑하는 제자는 아무런 거리낌 없이 옷을 벗고 원하는 대로의 포즈를 취하였다.

로댕의 많은 제자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솜씨를 보이는 것은 역시 까미유이었다. 그래서 로댕은 그녀를 신뢰하게 되었고 자기 작품의 섬세한 마무리 단계에 들어가는 작품은 까미유에게 맡기곤 했다.

이렇게 두 사람은 협력해서 많은 빛나는 작품을 완성하건 하였으며 그러는 사이에 두 사람은 급격히 가까운 사이가 되어 제자에서 연인으로, 연인에서 동거하는 사이로 변했다. 까미유는 처녀로 그를 만났지만 문제는 로댕은 유부남 이었다. 법적으로 엄밀한 의미에서 로댕은 죽을 때가 되어서야 조강지처를 호적에 올렸으니 두 사람이 만나는 시점에서 로댕은 법적으로는 총각인 셈이었다.

그러나 로댕은 로즈 뵈레(Rose Beuret)라는 여인과 동거하고 있었다. 로즈 역시 18세 때(1864) 로댕의 모델이 되었는데 1865년에는 로댕의 어린애를 임신하게 되었다. 로댕이 로즈를 모델로 택했던 것은 그녀는 농천 출신이기 때문에 단단한 근육질이어서 바로 로댕이 원했던 모델이었으며 또 수모가 깊어서 잘 순종하는 여인이었다. 그래서 로댕은 그녀를 말할 때 “로즈는 동물적이야.”라고 표현하건 하였다는데 이것이 그녀와 일생을 같이 살았던 중요한 이유의 하나가 된 것 같다.

그가 이야기하는 동물적이라는 의미는 여러 가지를 내포하는 듯하다. 우선은 로댕은 자기 화실에 불러드린 모델은 작업만 마치고 그대로 보내는 여인은 없었고 모델을 한결 같이 그의 뜨거운 입김을 쏘이고서야 방을 나올 수 있었다고 한다.

그의 여성 필력은 복잡해 그와 관계를 맺은 여인으로 알려진 것만도 수십 명이다. 그런데 로즈는 그의 이렇게 난잡한 여인과의 관계에 대해서 일언의 불평도 없었다. 아니 어떤 때는 그녀가 모델들이 누드 포즈를 취하도록 설득하는 것을 돕기도 하였다.

어느 여성이 소위 자기 남편이 다른 여인과 놀아나는 것을 방관하며 어떤 때는 일이 성사되도록 돕는 사람이 있겠는가. 정신 이상이거나 동물이 아니고서야. 그래서 그는 그녀를 버리지 않고 그녀가 죽을 때(1917)까지 평생을 같이 살다가 죽기 16일 전에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렸을 뿐 그녀가 낳은 자식을 자기 자식이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다고 한다.

로댕은 모델로 하여금 영감을 주는 포즈는 사랑에 노출되지 않고서는 취할 수 없다는 구실로 최상의 몸매를 지닌 아름다운 창조물들을 떡 주물 듯이 하고서야 화실을 빠져나갈 수 있게 하였다.

그래서 소설가 에밀 졸라(Emile Zola)는 말하기를  “그는 모델들의 아름다운 나신에 대해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그녀들을 눈으로 애무하고 때로는 손으로도 애무하면서 키스하고 어루만졌으며, 자신의 기쁨을 위해 그녀들을 그렸다. 그는 그것이 여성의 섹슈얼리티를 이해하는 노력이라고 하였다. 즉 그는 낮에는 그녀들을 그렸고 밤에는 그녀들을 품에 안았다. 그의 여자 누드의 중심축은 그와 모델들 간의 섹스였던 것이다.”

로댕이 까미유를 꼬일 때도 마찬가지의 수법을 썼으며 까미유가 동거하고 있는 로즈에 신경을 쓰는 이야기를 하면 로즈는 동물적인 여인이기 때문에 신경 쓸 것 없으며 곧 그녀를 정리하고 “너하고 정식으로 결혼 하마.”라고 철석같이 약속을 하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로댕은 그 약속을 지키지 않은 것은 물론이고 다른 모델과 노라나 곤하니까 이를 보다 못한 까미유는 로댕에게 덤벼들었다. 그럴 때 마다 로댕은 앞으로는 절대로 안 그러겠다고  약속하여 그 장면을 모면하고는 또 다른 여인을 넘보는 것이었다.

로댕이라는 남자는 당시 예술가들이 그랬듯이 예술적 영감을 얻는다는 구실로, 말도 안 되지만 우기면 할 말이 없는 가치관을 지닌 남자이었던 것으로 그는 실로 수많은 여성과 관계했고, 까미유도 로댕의 그 흔한 여자중의 하나에 불과 했다.

이런 사실을 알고도 참아 오던 까미유는 1890년에 와서는 그와 결별을 선언하게 되었다. 까미유는 뛰어난 조각가였다. 그리고 로댕의 가장 근사한 모델이었으며 로댕 조각의 수많은 작품들이 그녀와의 사랑에서 비롯되었던 것이다. 또 그의 수많은 조각들이 그녀가 손을 더 했기 때문에 빛이 났던 것이다.

그나마 그녀의 정신이 멀쩡할 때 빚어낸 주옥같은 작품이 지금도 파리의 로댕 미술관의 방 하나를 차지하고 있어 결국 죽어서라도 그의 곁을 떠나지 못하는 불멸의 연인이 되긴 하였지만 더 크게 꽃필 수 있었던 한 여류 조각가의 일생이 한 남성의 야욕에 의해 철저하게 유린되어버린 것은 안타까운 일로 영구히 남게 될 것이다. 

로댕과 결별한 그녀는 그 당시의 유명했던 음악가 드뷔시(Claude Debusey)와 관계를 맺었지만 로댕의 방해로 그들의 관계는 무산되고 말았다. 그녀가 만든 작품 ‘중년(숙명)’(1889)에 그녀의 한이 서려 있다. 표면상으로는 젊은 여자가 노파에게 끌려가는 남자를 안간힘을 다해 붙들고 있어, 젊음은 한때일 뿐이며 나이가 들어가는 것은 어쩔 수 없다는 것을 표현한 것으로 되어있지만, 실은 젊은 여자가 로즈에게 끌려가는 로댕에게 처절하게 매달리는 까미유 자신을 표현 한 것이다. 

까미유는 로즈를 마치 마귀할멈처럼 표현했으며, 로댕은 알뜰한 젊은 여성의 충정어린 충고와 사랑을 아랑 곳 하지 않고 무기력하게 마귀할멈이 하자는 대로 따라 끌려가는 무기력한 남성으로 표현했다. 얼마나 뼈에 사무치는 질투와 증오로 한이 매쳤으면 이런 작품을 남겼을까, 그 심정은 충분히 이해가 가고도 남음이 간다.

로댕과 이별하였지만 그녀는 밤마다 잠 이루지 못하는 밤에는 로댕과 로즈의 동물 같은 사랑 장면을 떠올리고는 치를 떨었다. 이러한 정신적인 고통뿐만이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심한 타격을 받은 그녀는 정신 발작을 일으켜 앙김(Enghiem)의 몽드베르그(Montdevergues)수용소에 강제 수용되는 신세가 되었다. 정신병원에 수용된 까미유는 76세로 사망할 때까지 무려 30년간을 병원에서 나오지 못하고 그 곳에서 생을 마쳤다. 

실은 자기의 독창적인 예술성을 로댕의 마수에 걸려 그 뒤에 묻어놓고 분하고 원통해 정신병자가 되어 반생을 로댕이 파놓은 구렁에서 벗어나질 못하고 헤매 이다가 세상을 하직한 지독히 분하고 서러운 여자의 일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