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오른 손 장갑을 잃었다

  • 입력 2018.02.14 11:46
  • 기자명 홍지헌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엠디저널]현봉학 박사는 한국전쟁 당시 1950년 12월 15일에서 24일까지 열흘간에 걸쳐 펼쳐진 흥남철수작전의 주인공 중 한 분이다. 이때 10만 명의 피난민도 함께 안전하게 철수시킨 공로를 인정받아 국가보훈처 선정 2014년도 12월의 전쟁영웅이 되었다.

민간인이 전쟁영웅이 된 것은 현봉학 박사가 처음이었고 그 일을 계기로 동상 (銅像) 건립이 추진되어 드디어 2016년 12월 19일 서울역 앞 세브란스빌딩 광장에 동상이 세워졌다. 그곳은 현봉학 박사의 모교인 세브란스 의전(醫專)이 있던 자리다.

지난해 12월 19일에는 동상 건립 1주년 기념식을 맞아 사단법인 현봉학 박사 기념사업회가 발족(發足)되었고, 현봉학 박사의 자서전을 재출간하여 가족들에게 헌정(獻呈)하는 행사를 가졌다. 동상 건립 1주년에 즈음하여 헌시(獻詩)를 쓴 관계로 오후 진료를 휴진하고 나도 행사에 참여했는데, 의료계의 저명한 어른들이 많이 오신 관계로 이리저리 다니며 인사를 드리다가 장갑을 잃어버렸다. 행사 진행 요원이 왼쪽 장갑은 찾아주었는데 오른쪽 장갑은 행사가 끝날 때 까지 찾지 못했다.

실내 행사가 끝나고 실외 행사에서는 군악대의 연주에 맞추어 해병대 의장대가 총검을 장착한 채 공연을 펼쳐 전쟁영웅 추모식의 분위기를 물씬 풍겼다. 날씨가 유난히 추워 장갑을 낀 왼손으로는 행사장에서 받은 현봉학 박사 자서전을 들고, 오른손은 품안으로 넣었다. 행사를 마무리하는 의미의 헌화(獻花) 순서가 되었다. 군악대의 연주에 맞추어 일곱 분의 행사 대표들이 꽃을 바치는 동안 내빈들은 모두 우렁찬 박수를 보냈지만 나는 박수를 칠 수 없었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품안으로 찔러 넣은 오른손으로 심장이 뛰는 것이 느껴지는 것이 아닌가. 현봉학 박사에 대한 존경심과 후배로서의 자부심이 심장의 힘을 빌어 요란스럽게 뛰는 것을 느낀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오후 진료를 포기하고 부랴부랴 행사에 참석했지만 나 같은 내빈은 와도 그만 안와도 그만인 느낌이었는데 우연치 않게 장갑을 잃은 관계로 가슴이 뛰는 것을 내 손바닥으로 느끼며 그런 생각이 모두 사라지는 감동의 순간을 경험한 것이다.

생각보다 일찍 행사가 끝나 아내에게 전화하여 밖에서 만나서 함께 저녁을 먹고 장갑을 새로 샀다. 또 잃어버릴 수도 있으므로 너무 비싼 것 보다는 적당한 것으로 골랐다. 껴보니 조금 손에 크다고 느껴졌지만 그냥 샀다. 손에 작은 장갑은 사용하기 불편하지만 큰 장갑은 패션으로 평가하지 않는 한에서는 사용하는데 불편은 없을 거란 생각에서였다. 시로 써놓고 보니 아내의 큰 사랑에 대한 감사의 마음으로 읽혀 덤을 얻었다.

이 시를 읽은 사단법인 현봉학 박사 기념사업회 이사장이신 한승경 회장님께서, 밀라노에서 구입하셨다는 황갈색의 이태리 가죽장갑을 선물로 주셨다. 멋쟁이 신사나 연예인들이 아니면 소화하기 힘든 색깔의 가죽장갑을 선물로 받으니 아마도 평생 잊지 못할 내 인생의 장갑이 될 것이었다.

한 편의 詩, 모교에 대한 자부심, 아내에 대한 새삼스러운 고마움, "밀라노 가죽 장갑……"

장갑을 잃어버린 후 얻게 된 것이 하나 둘이 아니다. 삶은 예상치 못한 쪽으로 전개된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실감했다.

저작권자 © 엠디저널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