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OPINION 전문가 칼럼 왕성상
아날로그적 정서 담긴 추억의 대중가요 ‘봄비’

[엠디저널]1970년 박인수 취입해 빅히트…‘한국 최고 소울가수’ 평가
신중현 작사·작곡, 이정화 1969년 첫 발표 했으나 호응 적어

이슬비 내리는 길을 걸으며 봄비에 젖어서 길을 걸으며
나 혼자 쓸쓸히 빗방울소리에 마음을 달래도
외로운 가슴을 달랠 길 없네 한없이 적시는 내 눈 위에는
빗방울 떨어져 눈물이 되었나 한없이 흐르네

봄비 나를 울려주는 봄비 언제까지 내리려나
마음마저 울려주네 봄비 외로운 가슴을 달랠 길 없네
한없이 적시는 내 눈 위에는 빗방울 떨어져 눈물이 되었나
한없이 흐르네
봄비 나를 울려주는 봄비 언제까지 내리려나
마음마저 울려주네 봄비 외로운 가슴을 달랠 길 없네
한없이 적시는 내 눈 위에는 빗방울 떨어져 눈물이 되었나
한없이 흐르네
라라라라라 라라라 라라라라라
봄비가 내리네 봄비가 내려~~~ 봄비가 내리네 비가 내려
봄비가 내리네 봄비가 내려
아~~아아아아앙~ 아~~아아아아아으아~
와우와 으아아아아으아

신중현 작사·작곡, 박인수 노래의 ‘봄비’는 아날로그적 정서가 듬뿍 담긴 추억의 가요다. 4분의 4박자, 슬로우고고 리듬으로 봄비가 올 때 부르면 운치 있다. 감성적이면서도 촉촉이 내리는 봄비를 맞으며 걸어가는 이의 쓸쓸함이 묻어난다. 노랫말 가운데 이슬비, 빗방울소리, 외로운 가슴, 눈물 등의 단어들이 분위기를 말해준다.

지금이야 우산이 흔하지만 1960~70년대만 해도 귀했다. 그땐 보슬비 정도는 아무렇지도 않게 맞으며 걸어가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었다. ‘봄비’ 노랫말에서 그런 전경이 아련하게 그려진다. 긴 가사만큼 멜로디가 길게 이어진다. 보통 가요의 거의 두 배인 6분50초간 흐른다. 내용도 다분히 시적(詩的)이다.

◇ 박인수, 1967년에 신중현과 만나

이 노래는 1969년 가수 이정화가 발표했지만 별 호응을 얻지 못하고 1970년 박인수(71· 본명 백병종)가 다시 불러 폭발적 사랑을 받았다. 그 바람에 박인수는 ‘음악성이 뛰어난 한국 최고의 소울(soul)가수’로 평가받았다. 리메이크로는 이 노래만큼 여러 버전을 가진 곡도 없다. 그때로선 매우 드물게 강한 샤우팅(shouting, 록의 상징적 창법으로 굵고 강하게 내지르는 발성) 소리를 냈던 박인수 목소리가 먼저 꼽힌다. 한때 유행했던 ‘김추자 버전’, 한국적 목소리의 1995년 ‘장사익 버전’, 박인수가 20년 만에 부른 ‘신촌블루스 버전’까지 갖가지다. 그만큼 이 노래는 대중에게 잘 잊히지 않는 작품이다.

‘봄비’ 작사·작곡가 신중현과 가수 박인수의 인연은 51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67년 어느 날 낮 신중현이 음악연습을 하고 있을 때 훤칠한 키의 박인수가 “자기를 한번 테스트해달라”며 찾아갔다. 신중현이 “뭐하는 사람이냐?”고 묻자 “소울음악을 하고 있다”며 자신감을 보였다. 박인수는 템프테이션스(The Temptations: 1960년부터 활동한 아프리카계 미국인 남성 5인조 그룹)의 ‘My girl(마이 걸)’, 오티스레딩(Otis Redding: 미국가수, 1941년 9월 9일~1967년 12월 10일)의 ‘Duck of the Bay(덕 오브 더 바이)’ 등을 불렀다. 그는 흑인들이 울고 갈 정도로 절창이었다. 플레터스, 샘쿡, 레이찰스 등 흑인가수들 노래라면 못 부르는 게 없었다.

박인수는 그날 밤 미8군 클럽무대에 설 수 있었다. 백인클럽이어서 흑인들은 문에 기대어 노래를 훔쳐 들을 수밖에 없는 곳이었는데도 몰려들었다. 박인수의 몸짓 하나 하나에 박수를 치고 난리였다. 신중현은 박인수를 서울 신촌 연세대 앞 사무실에서 ‘봄비’를 1주일 연습시켰다. 후렴부분에서 무릎을 꿇고 땅을 치며 뽑는 대목에선 공연장이 떠나갈 만큼 인기였다. 박인수가 어릴 적 미군기지촌에서 자라 그곳 무대에서 봐둔 것들이 되살아난 것이다. “박인수가 섰던 그 무렵 공연장은 국내 첫 소울무대였다”고 신중현은 자서전을 통해 회고했다.

신중현은 1962년 미국, 영국에서도 막 생겼던 락그룹 에드포(Add4)(당시 표기는 ‘에드훠’)를 우리나라 처음 만들었다. 비틀즈, 롤링스톤즈 같은 노래그룹들도 1963년, 1964년에 1집 음반을 냈던 점으로 볼 때 에드포는 세계적 흐름을 봐도 빨랐다. 하지만 오래 못 갔다. 락그룹이 낯설어 음반 몇 장만 낸 채 1966년 깨졌다. 미8군무대로 되돌아간 신중현은 그룹 ‘블루즈 테트(Blooz tet)’를 만들어 활동하던 중 박인수가 노래를 부르고 싶다고 해 인연을 맺은 것이다. 소울분위기 노래를 잘 불렀던 박인수는 블루즈 테트의 리드보컬이 됐다. 그래서 지금도 ‘봄비’하면 박인수다.

◇ 파킨슨병 등으로 10년간 가수활동 중단

박인수는 ‘봄비’ 노래에피소드 못잖게 사연이 많은 가수다. 북한(평안도)에서 태어나 그의 삶은 부평초 같았다. 6·25전쟁 때 남으로 피난 와 떠돌다 춘천초등학교를 2년간 다녔다. 그는 1970년 발표한 ‘봄비’, ‘나팔바지’를 시작으로 1992년 번안곡 ‘해 뜨는 집’까지 11장의 음반을 냈으나 췌장암후유증, 단기기억상실증, 파킨슨병 등 건강문제로 음악활동을 쉬었다. 요양시설에 있으면서 10년간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했다. 2002년 동료가수들이 치료비를 돕기 위해 연 자선콘서트에 나타난 게 전부다.

그는 몇 년 전 싱글음반을 냈다. ‘해 뜨는 집’ 이후 22년 만이다. 앞서 2013년 11월 17일 밤 서울 홍대 앞 상수역 베짱이홀에서 펼쳐진 ‘앙코르, 박인수와 친구들’에서 신곡 ‘준비된 만남’ 음원을 공개해 눈길을 모았다. 박인수와 친한 재즈보컬리스트 김준이 만든 곡이다. 박인수가 활동을 본격 재기한 2012년 처음 녹음, 1년 5개월 만에 레코딩했다. 혼성 4인 그룹 해리티지, 바리톤 박선기 서울예대 지도교수가 힘을 보탰다.

2014년 1월 미국 뉴욕에선 현지 한인회 초청콘서트무대에도 섰다. 투병 후 첫 라이브공연이었다. 뉴욕은 박인수에게 특별한 곳이자 제2의 삶이 시작된 곳이다. 전쟁고아로 12살 때 미국으로 입양돼 뉴욕 할렘가를 맴돌다 솔 음악을 익혔다.

그는 이혼했던 옛 부인(곽복화)과 2012년 봄 40년 만에 재결합, 건강이 회복돼 다시 일어섰다. 가족과 음악 선·후배들 도움으로 재기를 준비한 그는 그해 6월 서울 홍대 앞 재즈클럽 문글로우(Moon Glow)에서 ‘박인수와 함께 하는 솔의 만남-어메이징 그레이스’를 통해 복귀신호탄을 올렸다. 이어 남양주 김준재즈카페, 부산 해운대 등지에서 10여 번 공연했다. 몸이 완전치 않아 주위사람들 도움을 받아 무대에 서는 토크콘서트 형식이었다.

2012년 말엔 재즈보컬리스트 김준(74), 포크듀오 ‘하사와 병장’ 출신 이경우(68)와 함께 ‘히스 컴백-올드 이츠 뉴(He’s comeback-Old It’s New)’ 무대에 서 몸이 어느 정도 회복됐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건강이 다시 나빠져 필리핀에 있는 메디컬마사지 허봉현 전문의 도움으로 한 달 여 현지에서 물리치료를 받았다. 비용은 팬클럽회원들이 모았다. 덕분에 혈액순환이 좋아져 필리핀에서 세부 한인회밴드와 공연까지 했다.

2012년 4월 박인수 사연을 소개한 KBS 1TV ‘인간극장’ 이후 그의 삶을 담은 다큐멘터리까지 만들어졌다. 2014년 7월 4일 방송된 KBS 2TV ‘여유만만’에서도 같은 내용이 소개됐다. 투병 중인 박인수와 가족이야기가 담긴 것이다. 아내 곽 씨가 잘 알려지지 않았던 지난 날 얘기를 털어놨다. 몸을 가누지도 못하는 박인수로 인해 잠시도 눈을 뗄 수 없던 상황을 설명하며 눈물을 흘렸다. 그녀는 “남편 박인수가 2~3개월 전부터 폭언을 하는데 2~3분 지나면 기억을 못한다. 전쟁고아라서 어린 시절 상처가 쌓여있는데 그 때문인 것 같다”고 말했다. 박인수는 미국입양 후 귀국했으나 어디에도 정 붙일 곳이 없었던 외로운 신세였다. 두 번의 결혼실패 등 힘겨운 삶을 이어온 그는 천성적으로 슬픈 영혼을 가진 가수였다.

◇ 신중현, 한국 락의 ‘살아 있는 전설’

한국 락의 ‘살아 있는 전설’로 통하는 신중현도 얘기가 많은 음악인이다. 1938년 1월 4일 태어난 그는 초등학교까진 유복하게 자랐지만 6·25전쟁이 터지면서 불행이 시작됐다. 피난 중 아버지 건강이 나빠지면서 집안이 기울었다. 부모와 여동생이 세상을 떠나면서 고아신세가 됐다. 어쩔 수 없이 남동생을 시골친척집에 맡기고 서울에 온 그는 친척이 경영하는 상수제약 공장에서 일하면서 어린 나이에 가장역할을 했다. 그런 힘든 생활 중 유일한 취미이자 탈출구는 기타였다. 그의 노래에 짙게 베인 고독과 외로움은 불행했던 ‘어린 시절’이 마음에 늘 남아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1957년 어느 날 미8군 무대오디션을 본 그는 “내일부터 나오라”는 말을 듣고 기뻐했다. 문제는 “전자기타와 앰프가 있다”고 거짓말을 해버린 것이다. 돈이 없어 기타와 앰프를 사지 못해 방황하고 있던 중 우연히 상수제약에서 함께 일했던 벗을 만났다. 사정을 들은 그 친구가 흔쾌히 기타와 앰프를 사주면서 음악 삶을 꾸릴 수 있게 됐다. 미8군에서 신중현의 인기는 자꾸 높아졌다. 작고 마른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폭발적인 연주가 미국 사람들에겐 신기했든지 그는 유명연주인이 돼가고 있었다. 그때 별명은 ‘히키 신’. ‘히키 신-기타멜로디 경음악 선집곡’이란 연주앨범을 내기도 했다.

1960년께 그의 첫 기타독주무대가 서울 용산역 앞 미군정보부 소속의 시빌리안클럽에서 열렸다. 클럽책임자가 신중현에게 Virtues의 Moogie Shuffle이 담긴 음반을 주며 그 곡을 연주하라고 주문했다. 시빌리안클럽은 우리나라에 와있는 미군들 중 고위층이 드나들던 곳이었다. 부부동반으로 연주를 본 군인들은 기립박수를 보냈다. 신중현은 “그때가 지금까지의 음악생활 중 가장 기억에 남는 무대”라고 떠올렸다.

[참고문헌 : ‘신중현과 아름다운 강산’(노재명 지음), 신중현 자서전 ‘록의 代父 신중현’ 등]

왕성상  emd@mdjournal.net

<저작권자 © 엠디저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왕성상의 다른기사 보기
icon인기기사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