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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드나무 Ⅱ

버드나무 서경(敍景)과 이별

  • 입력 2019.07.16 10:55
  • 기자명 신종찬(신동아의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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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엠디저널]골목길을 나와 가지에 노랗게 움이 튼 오류정(五柳停) 늙은 왕버드나무 밑을 지난다. 신발에는 덕지덕지 진흙이 묻어난다. 검은 교복에 노란 단추가 빛났고 검은 모자에 노란 모표도 빛난다. 할머니는 시골 초등학교에서 중학교에 진학하여 시내로 가는 손자를 배웅하러 동구 밖까지 나오셔서, 늙은 버드나무처럼 일그러진 손으로 눈물을 훔치신다. 버드나무 잔가지엔 벌써 노랗게 봄이 왔지만, 큰 가지에선 썩은 그넷줄이 하릴없이 바람을 타고 있다.

버드나무는 계절마다 다른 서경과 풍취를 보여준다. 봄이면 일찍 움이 트고 꽃을 피워 새봄을 알린다. 여름에는 시원하게 늘어뜨린 녹음 짙은 가지들이 풍성한 그늘로 쉼터를 만들어준다. 늦가을이면 한 잎 두 잎 떨어지는 노란 잎이 쌓여 어느새 낙엽 더미를 이룬다, 겨울에 길게 늘어진 버들가지들이 일렁거릴 땐 어딘지 쓸쓸한 느낌을 준다.

서양에서도 수양버들가지(willow)는 친구를 잃었을 때 슬픔을 표시하는 상징이라고 한다. 나는 팝송 <트라이 투 리멤버(톰 존스 작사, 하비 슈미트 작곡. 1960년)>를 무척 좋아하여, 곧잘 따라 부르곤 한다. 전곡(全曲)을 통하여 버들가지처럼 부드럽게 이어지기는 멋진 압운(rhyme)들이 일품이다.

Try to remember the kind of September
-중략-
Try to remember When life is so tender
Then no one wept except willow.
기억을 떠올려 보세요. 삶이 평탄하여
버드나무 말고는 아무도 눈물짓지 않던 그때를

우리나라 자연부락 어디를 가나 마을 어귀에서 쉽게 버드나무를 볼 수 있다. 5그루의 버드나무를 배경으로 한 오류정은 동진(東晉) 도연명(陶淵明)의 행적에서 유래한다. 그는 41세에 벼슬을 사직하고 향리에 돌아와 오류정을 짓고 시서(詩書)를 즐기며 자연을 벗 삼아 살았다. 예부터 버드나무는 이별이나 작별의 상징이었다. 가족이나 친구를 보낼 때는 마을 어귀까지 나와서 작별을 했다. 이수광(李?光:1563~1628)은 《지봉집芝峯集》에서 다정한 친구와의 작별을 <송객(送客)>이라는 멋진 시로 남겼다.

해질 녘 시냇가 다리에 말을 세우고 (인마계교석 入馬溪橋夕)
바삐 술 한 잔을 서로 나누었네 (총총주일호 悤悤酒一扈)
헤어질 무렵에 선물을 주려했더니 (임분욕유증 臨分欲有贈)
버드나무엔 이미 남은 가지하나 없네 (양류이무지楊柳已無枝)

이처럼 버드나무를 주제로 한 문학작품에는 애수를 띠고 있는 예가 많다. 이는 아마도 소중한 사람과 이별할 때 징표로 버드나무를 꺾어주는 풍습 때문일 성싶다. 예부터 많은 시인이 버드나무를 이별과 연관 지어 회고(懷古)의 정을 불러일으키는 시를 읊었는데, 패강(浿江)으로 불렀던 대동강에 얽힌 시들이 많다고 한다. 그중에서 유명한 일화를 많이 남긴 시인의 시 한 편을 소개한다.

이별하는 사람들이 날마다 꺾는 버들(이인일일절양지 離人日日折楊柳)
천 가지 다 꺾어도 가는 님 못 잡겠네(절진천지인낙유 折盡千枝人莫留)
어여쁜 아가씨들의 하 많은 눈물 탓인 듯(홍수취아다소루 紅袖翠娥多少淚)
해질 무렵 부연 물결도 시름에 잠겨 있네(연파낙일고금수 煙波落日古今愁)
- 임제(林悌), 〈패강가(浿江歌)>, 《백호집白湖集, 1621년(광해군13)》

대동강 나루터에는 이별하는 사람들이 그칠 날이 없었다. 떠나는 임에게 무사히 다녀오기를 바라는 소망을 담아 버들가지를 꺾어주었다. 하지만 버들가지만 꺾어질 뿐 가는 임을 잡을 수는 없다. 대동강 물은 이별의 눈물 때문에 마를 날이 없다고 했다. 아쉬운 이별에 흘린 여인들의 눈물 탓일까. 저녁 물결도 시름에 잠긴 듯 안개가 자욱하였다. 이렇게 멋진 버드나무 시를 남긴 시인 임제는 마냥 감상적이지만은 않았다. 휘어지지만 부러지기는 어려운 버드나무 같은 시인이었다. 당대의 문재(文才)였지만 버슬 대신 기행(奇行)을 일삼은 임제는 “사해제국(四海諸國)이 다 황제라 일컫는데 우리만이 그럴 수 없다.”는 당시로써는 역사의식이 있는 뼈 있는 말을 남겼다.

예부터 버드나무로 유명한 3곳으로 능수버들로 유명한 천안 삼거리와 노량진의 노들강변과 평양의 대동강 변을 들었다. 특히 평양을 유경(柳京)이라 한 연유가《교거쇄편(郊居?編)》에 실려 있다. 평안도 사람들은 고구려 무인의 기질이 남아서인지 너무 강인하고 곧으며 부드러운 맛이 적었다. 이 정서를 유화시키려고 평양에 수양버들을 많이 심고 유경(柳京)이라 불렀다. 이후 평양에는 부드러운 풍류객이 많이 나왔다고 한다. 현재도 평양을 대표하는 건물로 105층 유경호텔이 있다.

버드나무가 부드러운 모성을 상징하는 점은 예법(禮法)에도 있다. 친상(親喪)을 당했을 때 상제들이 집는 상장(喪杖)은 고인이 부친일 때는 대나무 막대기를 짚었고, 모친일 때는 버드나무를 짚었다. 버드나무는 재질이 부드럽고 연해서 마치 어머니의 사랑만큼이나 온유하다는 뜻이라고 한다. 버들가지에 물이 오르면 그 껍질로 버들피리를 만들거나, 버들잎을 말아서 노래를 부를 수도 있다. 그 가락들은 대체적으로 애절하여 여성적이다.

고려의 이름난 시인 정지상(鄭知常)은 친구를 보내며 노래한 <송인(送人)>에서 “대동강 물은 언제 마르리, 해마다 이별의 눈물이 물결에 더하고 있으니(大同江水何時盡 別淚年年添綠波).”라 하며 석별의 정을 노래했다. 시인 정호승은 <이별 노래>에서 “떠나는 그대/조금만 더 늦게 떠나준다면/그대 떠난 뒤에도 내 그대를/사랑하기에 아직 늦지 않으리…”라고 했다. 떠나는 임에게 강가에 드리운 버들가지를 꺾어주었더라면, ‘임을 조금 더 늦게 떠나게’ 할 수 있지 않을까? 버들가지를 꺾고 전해주는 잠시 동안만이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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