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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학동 은행나무 아래서

  • 입력 2019.09.25 11:39
  • 기자명 신종찬(신동아의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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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엠디저널]소설(小雪)이 지난 인수봉(仁壽峰)꼭대기엔 까치 날개처럼 벌써 흰 눈이 쌓여 있다. 주변 아파트보다 높은 은행나무는 아름드리 우듬지까지 돌처럼 검고, 가지 끝에는 온통 노란 잎들로 빽빽하다. 쪽빛 하늘에 은행잎들이 황금빛 눈처럼 내려온다. 초가을부터 하늘을 노랗게 물들이기 시작하던 은행잎들이, 이젠 주변을 온통 노랗게 물들이고 있다. 온통 황금빛으로 둘러싸인 벤치에 앉아 있으려니, 마치 제왕이라도 된 듯하다.

이곳 연산군(燕山君)묘 앞에는 서울시 보호수 제1호인 은행나무가 있다. 이 은행나무는 8백년이나 되었다고 한다. 군왕이었다가 죄인의 몸으로 불과 서른두 살에 주검이 된 연산군이 땅에 묻히는 모습을 생생히 지켜보았으리라. 수령(樹齡)으로 미루어 그때 이미 이 은행나무는 수령이 200년 이상이었으리라. 황금빛 곤룡포에 면류관을 쓰고 천하를 호령하던 제왕은 마지막 소원이하나 있었는데, 실권하기 전에 잡아 둔 묘 터에 묻히는 일이었다. 다행이도 그를 몰아내고 집권한 중종(中宗)이 관용을 베풀었다.

절대 권력을 가진 그가 신하들에게 쫓겨나기 전까지 많은 죄와 실정을 저지른 것은 역사를 통해서 익히 알고 있다. 그의 폭정은 비난 받아야 마땅하지만, 그에게도 생각해볼 여지가 전혀 없지는 않다. 사연이야 어땠던지 왕비였던 어머니가 그가 두 살 때 쫓겨나 죽임을 당했고, 비록 왕자였지만 어머니의 사랑을 제대로 받지 못 했던 점은 무척 안타깝다. 아버지가 군왕이라도 어머니의 사랑 없이 올바른 인성이 깃들기는 쉽지 않았을 성싶다. 아버지가 좀 더 따스하게 아들을 보살폈다면 그의 운명이 달라지지 않았을까.

어떤 부모도 자식을 선택할 수 없지만, 어떤 자식도 부모를 선택할 수 없다. 그런 면에서 비록 연산임금은 왕이 되었다하더라도 회한이 남는 사람이 아니었을까. ‘열등감’이리는 말을 처음 사용했고, 심층심리학의 창시자인 의사(醫師) 알프레드 아들러는 《아들러의 양육법》에서 어머니의 역할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어머니는 아이가 최초로 사회계약을 맺은 사람이다. 어머니의 사랑은 최초의 사회적 인정이다. 아이가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에 의해 평가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아이는 사회적으로 적응하기 시작한다. 이때 어머니는 이중적인 성격의 기능을 한다. 첫 번째 성격은 아이가 스스로 세상에 처하게 되는 ‘상황과 중재’하는 것이며, 두 번째 성격은 아이가 스스로 성장할 힘을 키우고 다른 사람들에게 적응할 ‘힘을 키우도록 응원’하는 일이다.

아이를 가혹하게 다루는 시대가 지났지만, 지금처럼 이기적인 시대에는 자기자식이라도 무시하거나 미워하는 부모가 많다. 만약 혼외 아이나 장애아처럼 원치 않은 아이인 경우인 경우에는 더 심할 성싶다. 보호자들이 세상에 관심을 두지 않거나 세상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면, 아이들은 직관적으로 독립과 용기를 배우지만 이 용기는 언제나 사회에 맞서 ‘반항하는 엉터리 용기’다. 불행하게도 연산군이 바로 이런 예가 아닐까.

실바람에도 노란 잎들이 무리지어 떨어진다. 미련 없이 떨어지는 낙엽들이 나를 어설픈 철학자로 만든다. 대부분의 잎들은 제 멋대로 낙하하는 게 아니고 일정한 방향으로 맴을 돌며 파문을 그린다. 이 자연현상에도 분명 ‘일정한 법칙’이 있을 성싶다. 이처럼 세상 모든 일도 일정한 법칙이 있지 않을까? 이를 부처는 법(法)이라 했고, 도가(道家)에서는 도(道)라 했으며 헤라클레이토스가 주장한 로고스의 일부가 아닐까? 기록에 의하면 이 문제에 대해 고민한 사람은 기원전 600년 경 고대 그리스의 헤라클레이토스라고 한다. 만물은 유전한다며 “같은 강물에 발을 두 번 담글 수 없다.”는 그의 명언을 되새겨본다.

꿈을 안고 새봄에 돋아난 잎들은 이제 제 역할을 하고, 황금빛으로 변해 땅으로 돌아가고 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사람들은 예부터 황금빛을 좋아해왔고, 황금도 좋아하여 재물로 귀하게 여겨왔다. 나아가 종교와 사상을 초월하여 선한 사람이 되기 위한 지침을 ‘황금률’이라 불러왔다. 황금률은 여러 가지로 표현했는데, 공자는 기원전 500년경에 ‘내가 하고 싶지 않은 일을 남에게 시키지 말라(기소불욕 己所不慾 물시어인 勿施於人).’이라 했다. 비슷한 말들이 비슷한 시기에 이집트의 파피루스, 고대 그리스의 탈레스나 불경에도 있으며, 예수의 복음서에도 “무엇이든지 사람들이 너희에게 해 주길 바라는 대로, 너희도 그들에게 그리 해주라.(마태복음 7:12)”라 하였다.

최근에 이 은행나무도 생명의 위기를 겪었다. 아파트를 너무 가까이 지어 입이 점점 말라가는 고사(枯死) 상태에 빠졌다. 시민단체들이 주민들과 힘을 합쳐 대책에 나섰다. 가까이 있던 빌라 한 동까지 철거했다. 수년 동안 수액주사를 주렁주렁 매다는 등 각고의 노력 끝에 최근에 건강을 회복하여 잎이 무성해졌다. 그러나 큰 가지를 몇 개나 잘라냈고, 아직 잎의 크기도 젊은 나무들보다 작은 편이다.

은행나무 과는 공룡시대 이전인 고생대 이첩기(2억 8,600만~2억 4,500만 년 전)에 나타나서 15속(屬) 정도 존재했다한다. 그러나 모두 멸종하였고 중국이 원산지인 오직 현생 은행나무 1종만이 옛 모습을 간직한 채 남아 있기에, 은행나무를 살아 있는 화석이라고도 한다. 동양에서는 옛날부터 은행나무를 사찰에 많이 심어왔다. 은행나무는 잎이 넓지만 침엽수인 소나무와 같은 겉씨식물인데, 다른 침엽수들과는 달리 도심의 탁한 대기 속에서도 살 수 있고, 곰팡이와 벌레에 강하여 지금은 관상수로 세계 여러 곳에서 심고 있다.

방학동 은행나무에 비하면 인간의 일생이란 무척 짧지만, 이순(耳順)을 훌쩍 넘고 보니 내 인생도 결코 짧지 않았다. 나도 수 년 동안 남모를 고민으로 실의에 빠져 당뇨병까지 얻었다. 최근에 운동과 식이요법으로 당뇨 약을 거의 끊은 상태이지만, 늘 당뇨병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은행나무처럼 기력을 되찾아 건강하게 더 살며, 생업에 바빠서 하지 못했던 나 자신을 위한 여러 가지 일들도 해보고 싶다. 황금빛 낙엽들이 또 쌓여간다. 헤라클레이토스의 명언을 “사람은 같은 낙엽에 두 번 머리를 맞을 수 없다.”라 발짝 바꾸며 다시 생각에 잠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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