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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무새의 초상> 헤드기어

Head Gear

  • 입력 2019.12.09 10:00
  • 기자명 정정만(성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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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엠디저널]원초에 하느님이 움직이는 사람을 빚어내고 이르셨다. "네 몸에 붙어 있는 부품들은 모두 쓸모가 있나니, 그 생김새와 쓰임새에 따라 네 마음대로 사용토록 하라."

사람들이 그것을 제멋대로 놀려보니 한 곳에 어울려 모인 이목구비는 물론 길쭉한 사지까지 죄다 할 일을 하였지만, 어찌된 일인지 황량하기 그지없는 하반신에 홀로 우뚝 솟은 막대기 하나만은 자력으로 쾌유치 않는지라, 아둔한 남정네가 하느님께 물었다.

"하느님! 이 부속품은 도대체 무엇 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나의 전지전능한 신력을 응축시킨 사내의 정수이며 네 육체의 으뜸이니라, 비록 생김새는 흉물스러운 뱀 같지만 그 녀석의 성깔이나 변신술은 너희들의 의지를 초월한 것이다. 자립 능력은 있지만 스스로 즐거울 수는 없을 터. 그래서 너희들에게 거푸집을 내려 보내니 잘 다듬어서 어울려 사용토록 하라."

거푸집! 살로 된 그 틀은 참으로 오묘한 물건이었다. 제멋대로 자라난 이름 없는 풀숲 안에 앙증맞은 꽃 단추 하나, 어둠의 터널과 터널 입구의 덮개 한 쌍, 그리고 갖가지 혐오시설까지 한데 어우러져 집락을 이루었다. 거푸집 살 틀을 마주한 문제의 막대기는 달뜬 소리로 물었다.

"하느님! 이 무슨 변고란 말입니까? 저 도끼 자국 같은 괴상한 물건이 자꾸 손짓하고 있습니다. 몸은 벌써 돌덩이로 변해 있고 온 몸에 열이 나고, 뻐근하기까지 합니다."
하는님이 껄껄 웃으며 대답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음파를 송신하기 때문이다. 주저하지 말고 생김새대로 즉시 조립하라! 그것이 바로 나의 뜻이니라."

둘은 요철 맞춤을 시도한 후 천연의 쾌감을 따라 상부상조하며 일진일퇴, 좌충우돌, 이전투구, 용호상박을 벌인다.
"하느님, 기쁨으로 가득 찬 긴장이 온 몸을 파고들어 금새라도 터질 것 같습니다. 숨통이 막힐 것 같은…아니 고통 같은 쾌감이랄까요?…"
"주저하지 말고 격발하라."
실성한 막대기가 온 몸을 뒤틀며 발작하다 희멀건 액체를 토해내기 시작했다. 수억의 생명이 터널의 어둠을 뚫고 분사되는 순간, 천상 하느님의 용안이 환하게 다가왔다. 이래서 생긴 스포츠 종목이 야간 사격술이다.

사격 경기!
천혜의 용구인 08구경(요도 직경 0.8cm)소총 한 자루와 거푸집 살 틀이라는 단일 표적만 구비하면 누구나 언제 어느 곳이라도 즐길 수 있는 전천후 레저 스포츠요 까다로운 이론이나 기술, 특별한 용구나 시설도 필요 없는 만인의 대중 스포츠다.

횟수 제한이나 경기 시간 그리고 일정한 격식도 없다. 관중의 환호나 심판의 판정도 없다. 선수가 탈진해 녹아떨어질 때까지 지속되는 무제한 녹다운 자유형 혼성 경기이기 때문이다.

운동 종목 가운데 이것만큼 감격의 탄성을 쏟아내는 경기가 또 있을까? 사격 경기가 대중화한 것은 당연한 이치. 하지만 열풍만큼 안전사고도 속출했다. 안전장치가 장착되지 않은 총기의 결함도 문제지만 경기에 참여한 당사자들의 오발, 남발이 더한 골치다. 아무 과녁에나 총부리를 겨냥한 무차별 오락 사격 말이다. 하느님은 일찍이 각 사수의 독점 전용 표적을 지정한 후 '일사수 일표적'의 원칙을 강조했다. 일찌감치 사격술의 잡기화, 표적의 상품화를 경계한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천심을 거역했다. 노리개 표적, 일회용 표적이 사수들을 꼬드기고, 사수는 사수대로 이웃집 표적을 조준하여 연습사격, 과외사격을 서슴치 않았다. 그야말로 탄환이 난무하는 무서운 세상이 된 것이다.

총기 난사, 오발 사고에 의한 표적 파손과 총신 오염을 최소화하기 위한 보호구의 필요성이 대두 되었다. 19세기 중엽, 드디어 사선에 오를 때 착용하는 헤드기어가 개발되었다. 이상적인 보호 장구는 착용이 간편하고 활동에 무리가 없어 선수의 기록을 방해하면 안 된다. 따라서 가급적 두께가 얇은 초 슬림형이면서 내구성을 함께 갖추어야 한다.

기실, 사격 선수 보호 용구의 역사는 유명한 사격 선수였던 영국 왕 찰스 2세의 총기 난사 습성에서 기시되었다. 찰스 2세의 충성스런 주치의 콘돈(Condon)경이 왕의 총신을 덮는 아담한 자루를 만들어 왕에게 진상한 것이다.
"왕이시여! 사선에 오를 때는 반드시 헤드기어를 착용하소서"
"그것이 무엇인가? 생김새가 마치 장화 같구려!"
"폐하의 로얄 총기를 덮는 덮개이옵니다"
"덮개?"
"그러하옵니다. 폐하의 총기를 붙잡고 표적이 되고자 하는 여인들이 너무 많습니다. 헤드기어를 착용하고 사선에 올라 황실의 가계를 온전하게 보존하십시오."
"어허! 경은 그걸 무엇으로 만들었는가?"
"염소 맹장으로 만들었습니다. 염소 맹장을 취해 수 시간 동안 물에 담가 두었다가 다시 그것을 거꾸로 뒤집어서 약 알카리 액에 적시면 유연해 집니다. 이때 점막을 밀어내고, 근육 피막을 남겨 유황의 연소 증기에 넣어 둡니다. 이것을 비눗물로 씻어 말린 다음 18cm~20com길이로 절단하고 한쪽 주둥이를 리본으로 매어 만든 것입니다."

그날 밤 찰스 2세는 염소 맹장으로 만든 헤드기어를 착용하고 사선에 올랐다. 경기 감각은 물론 기록까지 부족함이 없었다. 콘돈이 기사 작위를 받은 것은 그 다음 날이었다.

이것이 콘돔(Condom)의 유래다. 콘돔은 계속 진화하여 린넨이나 견사 재질을 거쳐 레이텍스 제품으로 개선되었다. 전체 길이 17cm, 직경 5~5.5cm의 레이텍스 주머니는 좌우로 80cm까지 늘어나 이 상태에서 5분 이상 견딜 수 있고 물을 부어 넣으면 2리터까지 수용하는 기막힌 신축성을 가진다. 한때 '여자를 울리는 도구', '본성을 숨기는 새침떼기', '여자를 만족시켜 주는 애인' 등으로 불리던 사격 선수용 헤드기어는 100여 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세상의 모든 사수들의 생활필수품으로 자리를 굳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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