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OPINION 전문가 칼럼
배나무에 걸린 고전
  • 신종찬(신동아의원 원장)
  • 승인 2020.08.25 08:32
  • 댓글 0

[엠디저널] 녹초가 된 몸으로 개울가에 앉아, 시원한 계곡물에 발을 담근다. “보람 찬 하루 일을 끝마치고서, 두 다리 쭉 펴면 고향의 안방.” 산골짜기를 울리는 군가가 지친 몸을 달래주지만, 다리에 생긴 알통은 지친 몸을 개울가에 털썩 주저앉혀버린다. 마침 지척에서 계란만한 돌배 여남은 개가 달랑거린다. 갈증을 달래려 껍질 채 배를 입안에 넣는다. 이게 웬일인가! 지금까지 먹어본 과일 중에서 가장 맛있다. 껍질도 얇고 과육도 풍부한데다 무척 달다. 제대하면 꼭 다시 찾아와 이 배나무를 보전할 방법을 찾아봐야겠다.

이런 마음의 약속을 한 곳은 강원도 홍천, 홍천강가에 자리 잡은 모 사단의 유격훈련장에서였다. 약관 스무 여덟 살 대위 때였으니 벌써 38년 전이다. 당시 군의관이라 치료한다는 핑계로 훈련을 피할 수도 있었으나, 몇 년 째 사병들과 같이 한 마리의 ‘올빼미’로 훈련을 받았다. 초가을 민가 터에 자리 잡은 훈련본부 막사 앞에는 커다란 참배나무에는 먹음직한 배가 주렁주렁 달렸다. 언제 한 번 다시 그곳에 갈 수 있으려나?

우리나라에는 어딜 가나 깊은 산속에는 여러 종류의 야생 배나무들이 자라고 있다. 나무타령에서 ‘등나무 뒤인데도 배나무’라 하고 있고, 팥배나무, 콩배나무, 아그배나무, 돌배나무, 참배나무, 청배나무 등 배나무란 이름도 무척 많다. 배나무는 한국, 중국, 일본 등과 같은 동북아온대지방이 원산지인 과일이 둥근 동양배나무와, 터키 등 지중해 온대지방이 원산지인 표주박 모양의 서양배나무 계통으로 나줄 수 있다. 배는 제사상에 조율이시(棗栗梨柿) 중에서 세 번째 과일이다. 한 개의 과일에서 배의 씨가 6개라 육조(六曹)를 의미한다고 한다.

한국배나무는 재질이 단단하여 쓰임세가 많은데, 해인사 팔만대장경도 배나무나 대추나무로 만들었고 한다. 배나무는 사람들 곁에 있고 유용한 나무여서인지 문학 소재로도 무척 사랑을 받았다. 많은 문학작품 중에서도 고려시대 이조년(李兆年, 1269~1343)의 다정가(多情歌)는 널리 애송된다. 나도 고등학교 교과서에서 이 멋진 작품을 처음 대하고 너무나 멋져서 단숨에 외워버렸다. 어찌 사람이 이렇게 멋진 말을 할 수 있는지, 한 참 동안 여운이 가시지 않았다.

이화梨花에 월백月白 하고 은한銀漢이 三更인제

일지춘심 一枝春心을 가규子規야 알랴마는

다정多情도 병病인 양하여 잠 못 들어 하노라

하얀 배꽃, 휘영청 밝은 달, 은빛 은하수, 한밤 중, 흐트러진 배꽃 한 가지, 밤새 울어대는 두견이 소리에 잠 못 드는 밤의 시상을 어찌 이렇게도 잘 형상화할 수 있단 말인가?

배나무에 얽힌 일화 중에서 정몽주와 이성계에 관한 이야기도 유명하다. ≪고려사≫에 따르면 정몽주의 어머니 이 씨는 임신 중에 꿈에 난초 화분을 안고 가다가 갑자기 떨어뜨려 놀라 잠이 깨어 정몽주를 나았다고 애기 이름을 몽란(夢蘭)이라 했다. 이후 정몽주가 아홉 살 되던 해 어느 날 어머니가 낮잠을 자다 꿈에 용이 동산 가운데 있는 배나무에 올라간 것을 보고 놀라서 잠이 깨어 나가보니 몽란이 놀고 있어서, 이름을 몽룡(夢龍)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태조가 꿈을 꾼 후 토굴 속에서 수행하는 무학(無學)대사를 찾아가 해몽을 부탁했다. 그 꿈의 내용은 이러했다. ‘어느 시골을 지나는데 온 마을 닭들이 일제히 울어대더니 집집마다에서 방아 찧는 소리가 들렸고, 하늘에서 꽃이 마치 비 오듯 떨어졌다. 꿈이 이어져 이성계가 어느 집 헛간에 들어가서 서까래 세 개를 등에 짊어지고 나오다가 거울 깨지는 소리에 문득 꿈을 깼다.’ 이에 무학대사는 서까래 세 개는 임금 왕(王)을 의미하고, 아래와 같은 글귀를 주며 앞으로 이성계가 아주 귀하게 될 것을 예언했다.

낙화능성보花落能成寶 꽃이 떨어졌으니

능히 열매가 맺힐 것이요,

경파기무성鏡破豈無聲 거울이 깨졌으니

어찌 소리가 나지 않겠는가.

이성계는 등극 후 토굴이 있던 석왕사(釋王寺)를 크게 중창하고, 꿈에 본 낙화가 배꽃이라 여겨 뜰에 직접 배나무를 심었다. 이후 이 나무의 배를 진상하였다. 이 배는 청실배(靑實梨)였다고 하며, 멀지 않은 곳인 낙산사 근처의 낙산배도 청실배라고 한다. 이성계는 전북 운봉에서 수 십 년 동안 백성들을 괴롭히던 왜구를 무찌른 후 진안 마이산 은수사도 배나무 한 그루를 심었다. 이 배도 청실배였고 지금까지도 전해오고 있다. 춘향전에 춘향의 모친 월매가 춘향과 이도령이 첫날밤을 치르기 전에 대접하는 만찬에도 ‘청술레’라는 배도 청실배였다.

배나무나 배꽃을 소재로 한 우리나라 설화기록은 삼국시대부터 있다하는데, 대표적인 설화로는 <나무 아들>과 조선 전기 김시습의 금오신화에 들어 있는 한문소설 만복사저포기(萬福寺樗蒲記)가 있다. 후자는 독일, 중국, 일본 등 전 세계적으로 분포하는 ‘계모 구박 설화’의 한국버전이라 할 수 있다. 배나무 집 배조주 딸은 계모의 구박으로 ‘손이 없는 색시’가 되었지만, 하늘의 도움으로 손도 찾고 행복하게 살게 된다는 내용이다. 독일 설화에서는 배나무 대신에 사과나무라고 한다.

공자는 논어에서 ≪시경詩經≫을 읽어야 하는 이유의 한 가지로 ‘각종 동식물 이름을 알 수 있다(多識於鳥獸草木之名).’고 하였다. 그런데 배나무의 원산지가 중국인데도, 시경을 통 털어 배(梨)나 배꽃에 대해서는 한 구절도 없다. 이는 아마도 시경의 배경이 황하 이북이라 따뜻하고 수분이 많은 곳에 잘 자라는 배가 잘 자라지 못했기 때문이라 추측해본다(고려대 金彦鐘교수 자문). 배꽃을 소재로 한 수많은 한시(漢詩) 중에서 익숙한 것으로는 추구집에 실려 있는 춘래이화백(春來梨花白/東晋의 陶淵明)이란 구절을 들 수 있다.

조선 세종의 셋째 아들인 안평대군이 인왕산 기슭 수성동에 저택을 짓고 아름다운 꽃, 나무, 연못과 바위 등에서 48경을 찾아 시를 짓고 집현전 학자들과 함께 48편의 영시(詠詩)를 지었다. 시제 중에는 옥각이화(屋角梨花, 집 모퉁이 배꽃)도 있었는데, 성삼문은 이 시제로 멋진 시를 지었다.

춘우삼배후春雨三杯後: 봄비 내리던 날 석잔 술을 마시고

미타의수향微酡倚睡鄕 : 살짝 취한 채로 꿈나라로 갔다가

각래개량안覺來開兩眼: 단꿈을 깨고 두 눈을 떠보니

빙설영사양氷雪映斜陽 : 빙설 같은 꽃잎이 석양에 비치네

요즘은 관리하기 쉽게 배나무를 일정한 키로 T자나 Y자로 키운다. 배꽃은 예전과 같으나 자연스럽게 자란 배나무의 풍성한 모습은 야생에서나 볼 수 있다. 굵고 품질 좋은 배를 얻기 위해서는 온대라도 비교적 따뜻하고 여름에 비가 충분히 오는 곳이라야 한다. 이와 반대로 사과는 서늘해야 과실이 크고 충실하기에, 배의 명산지이면서 사과의 명산지가 되기는 쉽지 않다. 요즘 품질이 우수한 한국 배가 K-Pop처럼 전 세계적으로 큰 인기를 얻고 있다한다.

어릴 적 내 고향집 큰 대문 앞 언덕에도 아름드리 돌배나무가 있었다. 배꽃이 한창일 때면 벌 소리가 멀리서 달려오는 천군만마(千軍萬馬)의 행진소리 같았다. 배꽃의 꽃말은 순수, 순결, 온화한 애정, 위로, 위안이다. 배의 꽃은 한자로 이화(梨花)인데, 자두꽃(오얏꽃)인 이화(李花)와는 다르다. 고종황제가 ‘배꽃처럼 순결하고 향기로우며 그 열매를 맺듯이 그 향기 또한 그러하라.’라는 뜻으로 이화학당이란 교명을 내렸다고 한다. 해질 무렵 빙설 같은 배꽃 잎들이 석양에 흩날릴 때, 술 석 잔을 마지지 않았더라도 어찌 흥에 젖지 않을 수 있을까? 

신종찬(신동아의원 원장)  emd@mdjournal.net

<저작권자 © 엠디저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신종찬(신동아의원 원장)의 다른기사 보기
icon인기기사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