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뽕나무가지에 걸린 고전

나뭇가지에 걸린 고전(24)

  • 입력 2021.05.07 15:15
  • 기자명 신종찬(신동아의원 원장)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엠디저널] 푸른 갈대 잎들이 다투어 자라는 6월의 양재천변은 발걸음조차 푸르다. 천변을 걷는데 까마귀들이 여럿 모인 나무가 눈에 들어온다. 그쪽으로 오솔길처럼 갈대숲에 작은 길이 있다. 사람들이 드나든 흔적을 따라 가본다. 반짝거리는 무성한 널따란 잎 사이로 초록색, 빨간색, 검붉은 색 먹음직한 열매들이 주렁주렁 달려 있다. 순차적으로 익어가는 뽕나무 열매인 오디들이다. 까마귀들이 오디 만찬을 즐기다가, 인기척에 놀라 달아난다. ‘까마귀 오디를 마다할까.’라는 속담을 확인하는 현장이다.

동아시아에서 뽕나무는 아주 오랫동안 사람들에게 아주 가까운 나무였다. 중국의 시경(詩經, 國風) 빈풍(豳風) 에서도 ‘비가 내리기 전에 저 뽕나무 밭에서 뽕 뿌리 캐어다가(迨天之未陰雨태천지미음우, 徹彼桑土철피상두), 창과 문을 얽어 놓으면(綢繆牖戶주무유호)’라는 중국 최초의 우화시(寓話詩)인 치효(鴟鴞 올빼미, 이하 시경본색/유병례 지음)에도 뽕나무가 등장한다.

시경 정풍(鄭風) 장중자(將仲子)에서는 사랑을 위해 담을 넘는 사내에게 ‘내 뽕나무 부러뜨리지 마세요(無折我樹桑 무절아수상)/어찌 뽕나무가 아까워서 그럴까요?(豈敢愛之 기감애지)/형제들이 알까 두려워서 그래요(畏我諸兄 외아제형)’라 하고 있다. 또한 위풍(衛風) 맹(氓)에서도 남녀 간의 사랑에 뽕나무가 등장한다는 점은 우리나라의 ‘뽕도 따고 임도 보고’와 같다.

뽕잎 떨어지기 전에는 그 잎이 반지르르 했지요

(桑之未落 其葉沃若 상지미락 기엽옥약)

아, 비둘기들이여, 오디를 따먹지 말라

(于嗟鳩兮 無食桑葚 우차구혜 무식상심)

아, 여자들이여, 사내와 환락에 빠지지 말라

(于嗟女兮 無與士耽 우차여혜 무여사탐)

위 시에서처럼 그 옛날부터 양잠(養蠶) 산업이 발달한 중국에서는 누에를 치기 위해 뽕나무를 많이 키웠다. 뽕잎을 먹고 자라는 누에가 만든 비단은, 동서 교역을 촉진한 큰 동력이었다. 당시 세계 최고였던 중국의 비단이 동서양을 한 폭의 비단으로 감쌌다 할 수 있다. 실크는 최고의 옷감일뿐더러 신소재였다. 현재 외과수술 봉합사(縫合絲)는 인조실 이지만 예전처럼 여전히 실크(silk)라 부른다. 중국의 또 하나의 세계적 발명품인 종이도, 닥나무와 뽕나무를 8:1로 섞어야 더 좋은 품질이 된다고 한다.

창덕궁에서부터 깊은 산속까지 우리나라 어디를 가나 자생하는 뽕나무들을 볼 수 있다. 도심 자연하천인 양재천변만 해도 저절로 나고 자란 뽕나무들이 흔하다. 우리나라에 자생하는 뽕나무에도 여러 종류가 있다. 잎 모양도 넓은 하나의 원통형인 잎에서부터 삼지창 모양으로 갈라진 잎들까지 다양하다. 나무가 자라는 모습도 넓고 큰 원을 그리기도 하고, 산뽕나무처럼 10여 미터까지 곧게 자라기도 한다. 오디도 엄지만큼 큰 것에서 콩처럼 작은 것까지 여러 종류이고, 맛도 제 각각이다. 요즘은 좋은 오디를 얻기 위한 신품종들도 개발되어 있다.

자생종인 산뽕나무 종류를 제외하고도, 밭둑이나 논둑을 따라 자라는 껍질이 우윳빛인 중국산 뽕나무들도 도처에 많다. 서울만 해도 서초구 잠원동에는 뽕나무공원이 있다. 서울시 지방기념물 1호인 ‘잠실(蠶室)리 뽕나무’로 품종은 중국산인 백상(白桑:Morus alba)이다. 이 뽕나무는 잎이 원통형이며 뽕잎의 생산이 많아 조선 시대부터 장려했던 품종이다. 한강 변 모래땅은 물 빠짐이 좋고, 잦은 홍수로 기름져 좋은 뽕나무 재배지였다. 조선 시대에 좋은 뽕나무를 장려하기 위한 국가기관인 잠원(蠶園)을 이곳에 설치하였다.

우리나라도 비단을 얻기 위해 누에를 친 역사는 아주 오래되었다. 《한서(漢書)》 <지리지>에 의하면, 지금으로부터 3천여 년 전에 기자(箕子)가 동쪽으로 오면서 누에치기를 전했다는 기록도 있다. 그 후 삼한과 고려를 거치는 동안 역대 왕들이 양잠을 장려 발전시켰으며, 조선 시대에는 태종 11년 후비친잠법(后妃親蠶法)을 제정하여 왕후로 하여금 궁중에서 누에를 치게 하였다. 세조 1년에는 종상법(種桑法)을 제정 공포하여 대호 300그루, 중호 200그루, 소호 100그루, 빈호 50그루씩을 심게 하였으며, 뽕나무를 잘못 심어 말라 죽게 한 농가는 벌을 주기까지 하였다. 한글 창제 후에는 한글로 된 양잠서(養蠶書)까지 펴냈다고 한다.

이런 정책은 영국에도 있었다. 영국 왕 제임스 1세(재위 1603~1625년)는 실크 산업 보호를 위하여 얼마 이상의 토지를 가지고 있는 지주와 저택 소유자에게 뽕나무를 심도록 강제했다. 중국에서 들어오는 비단을 대체하기 위한 정책이었다. 당시 이 정책으로 대문호 셰익스피어도 자신의 집에 뽕나무를 심었다. 셰익스피어가 직접 심은 뽕나무가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이 나무의 가지를 꺾어가는 순례객들이 넘쳐났다. 이를 감당하지 못한 이 집의 새 주인은 아예 나무를 잘라서 재목으로 팔아버렸다. 셰익스피어 사후 150년이 지나서였다. 인근 가구 제조업자가 이 목재를 구매하여 지금도 유명한 ‘셰익스피어 뽕나무 가구’로 남았다. 영국의 유명 패션 브랜드 멀버리(Mulberry)의 상표도 바로 그 뽕나무에 기원을 둔다고 한다.

내 고향 안동은 삼베의 산지로 유명하지만 누에도 많이 쳤다. 인근 상주에 일찍부터 농잠학교까지 세워 잠업을 장려했다. 아마도 넓은 낙동강변이 뽕나무가 잘 자랄 수 있는 환경이었기 때문이리라. 낙동강 강변을 한 눈에 바라볼 수 있는 풍광 좋은 곳에 영호루(映湖樓)가 있고, 그 현판은 고려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해 안동에 몽진했을 때 친히 썼다. 이 누에는 정몽주, 이색, 정도전 등 고려의 인물부터 퇴계 이황까지 여러 명사의 한시(漢詩)가 걸려 있다. 여기에 안동부사였던 내 선조 신천(辛蕆, 고려 충숙왕)의 뽕나무를 소재로 한 시도 걸려있다.

此樓佳致設無多(차루가치설무다)

이 루의 아름다운 경치 말해서 무엇하리

摘勝探奇莫我加(적승탐기막아가)

나보다 명승을 더 탐내는 이 있으리요

百里桑陰藏野店(백리상음장야점)

기나긴 뽕나무 숲속엔 술집도 있고

四山松翠護官家(사산송취호관가)

사방 솔숲이 관가를 둘러싸고 있네

-하략-

어릴 적 단오(端午) 무렵 고향 우리 집에서 누에를 칠 때의 일이다. 대청마루에 앉아 있으면 조용히 내리는 빗소리 같기도 하고, 잔잔한 바람 소리 같기도 한 소리들이 누에를 치는 안방에서 들려왔다. 누에가 뽕잎을 먹는 소리였다. 수필가 윤오영(尹五榮)도 하룻밤의 이런 경험을 바탕으로 그의 명수필 양잠설(養蠶說)을 썼다. 이 작품에서 모든 문예 창작을 ‘언어의 집짓기’라 했다. 마치 뽕잎을 먹은(독서를 한) 누에가 잠을 자고(사색을 하고) 투명해진(마음을 비운) 상태에서 명주실(언어)을 뽑아 고치(집)를 만들 듯이 창작 과정도 이와 흡사(恰似)하다며, 그는 양잠가에게서 문장론을 배웠다고 했다.

뽕잎이 손바닥만 해지는 5월 초면, 할아버님께서 면사무소에서 누에씨(알)를 받아오셨다. 할머님은 나무 그릇 안에 채를 받치고 누에씨를 담아 따뜻한 안방 아랫목에 두고 살피셨다. 알에서 개미만한 누에가 곰실곰실 금방 기어 나왔다. 이를 털 누에 또는 개미누에(蟻蠶)라 한다. 누에고치로 면사무소에 팔고, 일부는 남겨서 농한기인 겨울에 집에서 명주실을 뽑았다. 숯불 위 냄비에 누에고치 여남은 개를 넣고 나무젓가락으로 휘저으면 실이 달려 딸려 나왔다. 이를 물레에 밧줄로 연결된 가락에 감고 물레를 돌리면 꾸리에 명주실이 감겼다. 실이 다 풀어진 고치에서 번데기가 나왔다. 징그러워 먹지 못하다가 누나가 먼저 먹으니 나도 따라 맛있게 먹었다. 내가 중2 때 할머님께서 돌아가시며, 장손인 내게 ‘손 명주’ 한 필을 손부며느리 혼수로 남기셨다. 그 명주로 만든 수의(壽衣)를 입고 아버님께서 하늘로 가셨다.

이 모든 사연이 뽕나무가 있어 가능한 일들이다. 

저작권자 © 엠디저널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