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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화(梅花) 사랑

나뭇가지에 걸린 고전(29)

  • 입력 2021.08.17 09:00
  • 기자명 신종찬(신동아의원 원장/의학박사/수필가/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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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엠디저널] 아침부터 청딱따구리가 어서 산을 오르라고 휘파람을 불어댄다. 지척인 앞산으로 향했다. 밤꽃은 이미 졌고 녹음이 짙다. 한 아름 반도 넘어 보이는 참나무와 느티나무가 산길 입구에 버티고 있고, 그 아래 고욤나무, 팥배나무, 노린재나무, 두릅나무들이 저마다 푸른 가지를 내어 성장하기에 바쁘다. 절터 입구 매실나무 높은 가지에는 노란 매실들이 빼곡히 달려 있다. 매실나무 아래쪽 처진 가지에 달린 매실들은 누가 벌써 수확해 갔다.

우리나라를 포함하여 동양3국 사람들은 매화꽃을 무척 사랑해왔다. 매화는 매난국죽(梅蘭菊竹) 사군자(四君子) 가운데 맨 먼저다. 아직 잔(殘雪)이 남아있는데, 잎도 피기 전에 꽃이 먼저 폈다. 게다가 맑은 향기까지 선물하고 있으니 어찌 매화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으랴. 추위를 아랑곳하지 않고 피는 매화꽃을 불의(不義)에 굴하지 않는 선비의 표상으로 삼았다. 또한 매화나무는 고목이라도 어린 가지를 내어 꽃을 피우기에 회춘(回春)을 상징하기도 했다. 

동양에서는 사랑을 상징하는 꽃 중에서 매화를 으뜸으로 쳐왔으며, 시나 그림의 소재로 가장 사랑을 받아왔다. 이름 있는 시인 묵객 중에 매화를 소재로 한 시나 그림을 남기지 않을 분은 없을 성싶다. 꽃말은 ‘높은 기품’이다. 매화를 다른 이름으로 빙자옥질(氷姿玉質)이라 부른다. ‘얼음같이 투명한 자태와 옥과 같이 뛰어난 바탕’이란 뜻이며, 용모(容貌)와 재주가 모두 뛰어난 사람을 가리키기도 한다.

‘일지춘(一枝春) 군자향(君子香)’이란 말도 있다. 무릇 선비라면 한평생 춥게 살아도 향기를 팔지 않는 매화(梅一生寒不賣香/申欽)의 기개와 품격을 흠모해왔다. 중국에서는 추운 겨울에도 매화 소식이 들려오면 술을 꿰차고 나섰다는 당나라의 맹호연(孟浩然, 689~740)과 ‘매처학자’(梅妻鶴子·매화를 아내로, 학을 자식으로 삼다)라는 별호로 불릴 만큼 매화를 좋아했던 송나라의 임포(林逋, 967∼1028)가 회자(膾炙)된다. 

우리나라에서도 기개 높은 선비나 문인들 중에는 매월당(梅月堂), 매헌(梅軒)처럼 매화 매(梅)자를 호에 넣는 수가 무척 많았다. 이퇴계(李退溪)선생님은 매화를 무척 아끼고 사랑하셨다. 어찌나 매화를 사랑하셨던지 평소 매화를 ‘매형’(梅兄), ‘매군’(梅君)이라 부르며 ‘혹애’(酷愛, 지독한 사랑)에 빠졌음을 고백하셨다고 한다. 61세가 되던 해 봄에는 도산서원 동쪽에 절우사(節友社)라는 화단을 조성해 매화, 국화, 소나무, 대나무를 심었다. 매화를 애지중지했던 선생님은 어느 날 시를 쓰다가 국화, 소나무, 대나무를 아꼈다는 도연명(陶淵明)을 언급하면서, “매화 형은 어찌하여 거기에 끼지 못했습니까(梅兄胡奈不同參)”하고 묻기도 했다. 선생님께서 30여 년간 쓴 매화 시는 모두 107수나 되고, 이 중 91편은 매화시첩에 남기셨다. 그 중에서 한 편을 감상해보자.

獨依山窓夜色寒 독의산창야색한

차가운 밤 산속 창가에 홀로 기대서니

梅梢月上正團團  매초월상정단단

매화 핀 가지 끝에 둥근 달이 떠오르는구나

不須更喚微風至 불수갱환미풍지

구태여 미풍이 다시 불어와 무엇하리

自有淸香滿院開 자유청향만원개

스스로 피어나는 맑은 향이 집안에 가득하거늘

돌아가시는 날도 매화를 염려하셨다. 임종 기록에도 “아침에 눈을 감은 채 말씀하시기를 ‘매화 화분에 물을 주라’고 하셨다. 오후 5시 무렵에 누운 자리를 정돈하라 하셨다. 부축해서 일으키니 앉은 채로 조용하게 떠나셨다.”고 적혀 있다. 퇴계선생님의 14세 손인 이육사(李陸史)선생님도 그의 절명시(絶命詩) <광야(廣野)>에서 ‘지금 눈 나리고/매화향기 홀로 아득하니/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라고 목 놓아 부르시다가 세상을 떠나셨다. 

매화는 이렇게 선비의 기개를 형상화하는 데만 시상(詩想)을 준 게 아니었다. 매화라는 객관적 상관물을 두고 구한말(舊韓末)의 대표적 시인이자 청빈(淸貧)한 관리로 이름이 높았던 명미당(明美堂) 이건창(李建昌, 1852~1898)선생의 시 <매화(梅花)>를 감상해보자. 

진일청재좌소감 盡日淸齋坐小龕

종일토록 청결한 재실의 신주 앞에 단좌(端坐)하니

시문주비어니남 時聞廚婢語呢喃

때때로 부엌데기가 재잘거리는 소리 들려오네.

사사양류재의호 絲絲楊柳裁衣好)

“실 같은 버들가질랑 옷 지으면 좋겠고 

립립매화작반감 粒粒梅花作飯甘) 

알알이 매화로는 맛있는 밥 지어야지”

 주인은 종일 감실(龕室, 재실)에 청결히 앉아 책을 읽거나 깊은 사유(思惟)에 있자니, 부엌에서 계집종이 가난한 살림살이를 걱정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옷가지가 부족하니 실버들 가지로 옷 지으면 좋겠고, 쌀이 부족하니 매화꽃이 쌀이라면 밥 지었으면 좋겠다고 한다. 고관을 지내신 분이 얼마나 청빈하게 살았으면 살림살이가 이렇게 어려웠을지 상상이 간다. 

이건창 시인은 15세에 과거에 급제하여 당시 세상을 놀라게 하였다. 우리 역사상 최연소 과거 급제자였다. 너무 일찍 급제하여 4년 동안 집에서 학문을 익히며 더 성장하기를 기다렸다가 19세에 홍문관(弘文館)에 들어갔다. 사신 행차의 서장관으로 중국에 가서도 문명(文名)을 알렸으며, 서릿발 같은 암행어사로도 이름이 높았다. 고종(高宗) 임금은 지방 관리들이 일을 제대로 처리하지 않으면, ‘암행어사로 이건창을 보낼 것’이라는 으름장을 놓았다는 일화까지 있다. 올곧고 천재였지만 너무 곧은 탓에 관직 생활이 평탄하지 못했다고 한다. 

중국 사천성(四川省)이 원산지라는 매화나무는 우리나라 어디에서나 잘 자란다. 수많은 품종이 있고 쓰임에 따라 매실 수확을 목적으로 심는 실매(實梅)와 꽃을 보기 위해 심는 화매(花梅)로 크게 나뉜다. 그래서 나무 이름도 매실나무와 매화나무 양쪽을 다 쓴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매화나무를 사랑하는데 그치지 않고 꽃, 나뭇가지, 뿌리까지 약으로 먹는다.

내 고향집 대문 밖 양지 언덕에 붉은 겹꽃 매화가 여러 그루 자라고 있다. 돌아가신 아버님께서 젊으실 때 도산서원(陶山書院)이 이웃한 면(面)의 면장을 하셨다. 내가 중학교 1학년 3월이었다. 도산서원에서 얻어온 귀한 나무라시며 지게 싹숭이(작대기)만한 매화 한 그루를 내 자취방에 갖다 주셨다. 나는 주말에 나무를 들고 낙동강을 건너는 등 40여리를 걸어가 시골집 언덕에 심었다. 벌써 50년도 더 된 일이니 이 나무는 고목이지만, 아직 힘차게 잘 자라며 붉은 겹꽃을 많이 피우고 있고 자손도 많이 남겼다. 몇 년 후가 될지 모르지만 의업(醫業)을 그만두면, 보리가을인 지금쯤 노란 매실이 많이 달려 있을 이 나무를 가까이 두고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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