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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이 합력해 선을 이룬다.
  • 김영숙(정신건강의학전문의/LA)
  • 승인 2022.01.12 1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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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엠디저널] 레베카는 직장생활을 열심히 하던 30대 초반의 백인여성이다. 그러나 최근에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그녀의 일상은 완전히 바뀌었다. 밤에는 통 잠을 못 이루고, 아침에는 침대에서 일어날 기운조차 없다. 또 하루 종일 우울증에 시달린다. 직장에 병가를 낸지도 몇 달 됐다. 그래서 정신과 의사를 찾아왔노라고 했다.

진단서를 보내지 않으면 해고를 당할 처지에 처했다고 했다. 그녀는 남편 얘기도 했다. 너무 참하고 인자한 자신의 남편에게 저녁 식사 준비를 해 준지가 몇 달이 넘었단다. 잠자리를 같이 한지도 까마득한 옛날이고….

나는 우선 ‘항우울제’를 복용하게 했다. 그녀의 직장에는 ‘우울증상’때문에 치료가 필요하니 병가를 연장해 달라는 서류를 보냈다. 직장에 대한 안심을 해야 치료가 될 테니 말이다. 그리고 다음 번에는 남편이랑 함께 오라고 보냈다.

레베카의 남편은 아주 사랑이 많고 침착한 50대의 신사였다. 그의 이야기를 듣다보니, 레베카는 단순한 ‘우울증’만이 아닌 ‘조증’증상을 갖고 있었다. 고녀는 폭발적이고, 신경질이 날 때면 기물을 부수기 일쑤였다고 한다. 전처의 딸에게도 질투가 심해 학대를 일삼는다고 했다. 레베카는 이를 시안했다. 그러나 그녀는 나름대로 남편에 대한 불만이 컸다. 그래서 둘은 ‘결혼 상담’을 받아보기로 결정했다. 마침 경험이 풍부한 가정치료사(Marriage & Family Therapist)에게 의뢰했더니 쾌히 응해 주었다. 그리고 레베카는 ‘항우울제’ 대신에 ‘정서인정제(Mood Stabilizer)’인 데파콧(Depakote)을 써보기로 했다. 다행스럽게 그녀는 이 제안에 잘 따라주었다(많은 ’조울증’환자들은 약을 쓰는 것을 한사코 싫어한다).

이 약은 간질 환자에게 투약하면 대뇌의 전기 스파이크를 조절해 간질이 방지된다. 그런데 이 약을 쓰고 있는 환자를 지켜보던 의사들은 그들의 정서가 많이 안정되고, 기분이 좋아지는 것을 발견했다. 그래서 드디어 조울증 환자들의 감정 조절에 사용하기 시작했다.

최고의 약은 가족의 사랑

데파콧을 복용하면서 레베카는 남편과 함께 부지런히 결혼 상담을 할 수 있었다. 적어도 50분간 앉아 견딜 만큼 자제력이 생겼기 때문이다. 곧 집을 나가버리고, 이혼 신청을 하겠다던 그녀의 남편도 일단은 계획을 연기했다. 말썽을 부리던 자신의 젊은 아내가 사실은 ‘대뇌 화학 물질의 불균형’ 때문이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는 아내를 비난하는 대신 이해하고 설득하려 애썼다. 자신의 전처의 딸은 당분간 친엄마에게 보냈다. 의붓 엄마의 병세가 호전되면 돌아오기로 약속을 하고….

차츰차츰 데파콧의 용량을 늘이면서 피 검사를 계속했다. 간에 무리가 올 수도 있고, 약의 농도가 너무 높아지면 위험하기 때문이다.

레베카의 남편은 얼굴이 홍안이다. 둥글둥글한 몸매와 표정이 꼭 석사여래상을 연상시킨다. 게다가 말도 없이 극진히 아내를 이해하려 애쓰는 모습이 부처님을 연상시킨다. 그래서 우리들은 그를 ‘핑크 부다(Pink Buddha)’라고 애칭을 지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분홍색 부처님의 표정이 점점 밝아지기 시작했다. 불안하던 레베카도 일단 안심했다. 자신이 괴롭혔던 어머니를 잃은 후 레베카는 심한 죄책감에 시달렸다. 아마 그 때문에 조증으로 이어졌었던 것 같다. 그리고 그녀는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두 자신을 떠날 거라는 공포감에 시달렸는데 그래서 무의식적으로 남편에게 더욱 행패를 부렸을지도 모른다. 이왕 떠날 사람이라면 앉아서 당하는 것보다는 쫓아보내는 것이 덜 괴로울 테니까….

어쨌든 상담의 힘과 약물의 도움, 그리고 가족의 사람이 어우러져 레베카는 곧 직장에 복직했다. 그녀와 남편이 오늘 함박 같은 웃음을 지우면서 나와 다른 치료사에게 한 말이 인상적이다. “당심들은 천사에요.” 천사는 아마 그녀 자신 속에 잠재해 있던 강인함과 남편인지도 모른다. ‘모든 것이 합력해 선을 이룬다’는 말이 문득 떠오르는 아름다운 오후이다.

김영숙(정신건강의학전문의/LA)  emd@mdjourna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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