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금발의 미녀 의사

  • 입력 2022.02.14 11:59
  • 기자명 김영숙(정신건강의학전문의/LA)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엠디저널]

가난한 불법 이민자와 오갈 데 없는 걸인 환자들이 줄을 지어 서있는 LA 카운티 병원 안에서 금발을 길게 늘어뜨린 아름다운 여인 닥터 P가 지나갈 때면 복도가 환해진다. 그녀는 연극을 전공한 발레리나다. 그녀는 연극과를 미친 후 직장을 구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고향을 돌아가 안주하기엔 그녀의 야심이 컸다. 그후 그녀는 연극과 교수가 될 생각으로 박사과정을 밟았다.

그러던 어느 날 자원봉사를 갔던 양로원에서 그녀의 인생 진로가 바뀌었다고 한다. 희망을 잃었던 사람들이 눈을 반짝이며 그녀를 기다렸다. 노인들도 기뻤지만, 그녀에게도 넘치는 희망을 불어 넣어 준 경험이었다. 그러다가 노안을 치료하는 의사들을 보면서 자신도 의술을 전공해야겠다고 느꼈다고 한다. 휠씬 강력하게 환자들을 변화시킬 수 있으리라는 기대와 함께 말이다.

그녀는 연극과에서는 우수한 성정이었지만 어떤 의과대학도 그녀에게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그렇다고 포기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알아낸 것이 멕시코에 있는 의과대학 과정, 그녀는 멕시코에서 4년간 의과대학을 수료했다. 처음에는 비참했다. 주위에서 사람들이 자신을 ‘거절된 의사(Reject Doctor)’라고 부른다는 것도 알았다. 반드시 훌륭한 의사가 되겠다는 집념으로 졸업 후 4년간의 일반 정신과 과정을 마쳤다. 현재 소아정신과의 수련을 받는 과정에서 나를 ‘수퍼바이저’로 만난 것이다.

닥터 P는 마리아와 같은 청량제

LA카운터 병원은 험한(?) 환자들로 유명한 곳이다. 마약이나 갱 문제로 총상과 칼부림을 당한 환자들이 많아 미국 군대 외과의들의 수련 장소로 이용된다. 다른 어느 전쟁터보다 위급한 환자들이 많다. 몸의 상처만큼이나 마음의 상처도 깊게 팬 환자들이 이곳 정신과에 온다. 오고 싶어 자기 발로 자청해 오는 환자들이 아니다. 대부분은 경찰이나 법정에서, 아니면 학교에서 명령해 오거나 아동 보호국에서 등을 미는 바람에 마지 못해 온다. 80%이상의 환자는 라티노이고 소수 흑인, 대부분 빈민이다.

이들에게 ‘연극인 정신과 의사’인 닥터 P는 마리아와 같은 청량제이다. 그녀는 늘 자신을 아름답게 가꾼다. 아무리 주위 환경이 낙후하고 고급스럽지 않다 해도 그녀는 자신을 그 수준으로 내려뜨리지 않는다. 환자를 대하는 그녀의 태도나 치료법도 최상의 경지다. 외국에서 외과대학을 나왔다고 해서, 이곳 정규 의대 졸업생보다 실력이 떨어지면 되겠느냐는 마음으로 그녀는 일을 한다고 했다. 그간에 여러 번 차별 대우를 받았다고 한다. 이 말을 듣는 또 다른 외국 의대출신 미국 의사인 나는 기분이 착잡했다. 나처럼 얼굴색이 다른 인종이 아닌 가장 미국인답게 생긴 미국인에게서 듣는 솔직한 고백이었으니까…. 그래서 작년에 닥터 P는 용단을 내려, 동부의 유명한 아이비리그 대학 정신과로 수연 과정을 옮겼었다. 어느 누구보다 훌륭한 수련의가 되고 싶었다고 했다.

그러나 웬걸, 이곳 LA에서 가난한 환자들과 씨름하면서 배우는 과정이 부유층 환자들을 치료하는 것보다 더욱 의미가 있었다. 되돌아와 6년간의 긴 수련을 마치면서 그녀는 내게 말했다.”앞으로는 법과 관계된 정신과의 최고 일인자가 되고 싶어요. 계속 연락할게요.”

최고의 연극인이 되고 싶었던 그녀의 앞날에서 섬광같이 빛나는 소아정신과 의사의 미래를 본다.

저작권자 © 엠디저널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