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music episode] 동족상잔의 슬픔을 노래하다, ‘전우야 잘 자라’

  • 입력 2009.06.01 00:00
  • 기자명 emddaily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1절)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앞으로 앞으로 낙동강아 잘 있거라 우리는 전진한다 원한이야 피에 맺힌 적군을 무찌르고서 꽃잎처럼 떨어져간 전우야 잘 자라(2절)우거진 수풀을 헤치면서 앞으로 앞으로추풍령아 잘 있거라 우리는 돌진한다 달빛어린 고개에서 마지막 나누어 먹던 화랑담배 연기 속에 사라진 전우야(3절)고개를 넘어서 물을 건너 앞으로 앞으로한강수야 잘 있더냐 우리는 돌아왔다 들국화도 송이송이 피어나 반기어주는 노들강변 언덕위에 잠들은 전우야(4절)터지는 포탄을 무릅쓰고 앞으로 앞으로우리들이 가는 곳에 삼팔선 무너진다 흙이 묻은 철갑모를 손으로 어루만지니 떠오른다 네 얼굴이 꽃같이 별같이<전우야 잘 자라>는 6.25동란으로 앞서 가버린 한 서린 전우를 떠올리는 슬픔의 대중가요이자 군가다. 가수 현인이 불러 히트한 이 곡은 1951년 국방부 연예중대에서 근무하던 유호 씨가 작사하고 같은 중대의 박시춘 씨가 작곡했다. 4분의 4박자로 힘찬 행진곡 풍이다. 진중가요인 <전우야 잘 자라>는 전쟁의 아픔을 달래주기위해 만들어졌다. 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국군과 유엔군이 9·28서울수복 뒤 38선을 넘어 북진할 때 만들어진 대표적 진중가요다. 세월은 흘렀지만 58년 전 상황을 알고 노래를 부르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코끝이 찡해지고 눈엔 이슬이 맺힌다. 비장하고 애조 띤 곡조에 폐부를 찌르는 듯한 노랫말이 피비린내 나는 6·25전쟁 상황을 너무나도 생생하게 그려내 등골이 오싹해진다. 일명 <북진의 노래>, 첫선 보이자 상종가전쟁기간 장병들의 심정을 노래한 <전선야곡>과 더불어 장병들 사기를 북돋아준 이 곡은 일명 <북진의 노래>로 불리며 인기를 끌었다. 노래는 완성되자마자 삽시간 전국으로 펴져나가 군인, 학생, 일반 남녀노소에 이르기까지 애창곡처럼 불렸다. 지금의 원더걸스 <텔미>만큼 상종가를 쳤다.군가는 장병은 물론 일반국민들과 함께 해왔다. 가사는 군인정신을 바탕으로 한 전황이나 전적·무공 등 용감한 내용들을 담은 시에 힘찬 행진곡풍의 곡조를 붙인 게 많다. 무형전력의 한 축을 맡는 군가는 전장 터에서, 경제성장의 깃발 아래서 피땀 흘린 장병들의 조국에 대한 불타오르는 애국심을 잘 나타내고 있다. 이 곡처럼 진중가요에 해당 되는 이 노래가 그렇다. 만들어진 때는 꽤 오래 됐지만 제작배경과 뿌리는 그런 흐름이다. ‘군가’로 알고 있는 곡들 중엔 진짜 군가가 아닌 게 있다. 분류가 확정지어진 건 아니지만 군가는 순수군가·진중가요·사가로 나뉜다. 순수군가는 국방부와 각 군에서 필요할 때 공모·위촉을 통해 선별된 것으로 군 사기와 정서순화를 위해 활용한다. <행군의 아침> <휘날리는 태극기> <진짜 사나이> <전우> <대한의 사나이> 등이 대표곡 이다. 진중가요는 군에서 애창되는 가요로 장병들의 정서함양과 병영생활에 활력소를 주는 내용을 담고 있다. 특히 시대의 애환과 민족정서를 대변한다. 6·25전쟁, 베트남 파병 때 전장에서 청량제 역할을 했다. <빨간 마후라>, <월남에서 돌아온 김 상사>, <굳세어라 금순아>, <전우야 잘 자라>, <전선야곡> 등이 애창됐던 것도 그런 맥락이다. <전우야 잘 자라>가 히트하기까지 그 이면엔 에피소드들이 많다. 먼저 가사 중 잘못 전해진 부분이 있다는 점이다. 3소절의 ‘적군’(敵軍)이 그 대목이다. 이 단어는 원래 ‘적구’(赤狗)였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적군’으로 바뀌었다. 초기 ‘적구’와 ‘적군’ 발음이 비슷하고 일반적으로 ‘적군’이란 용어에 익숙해 당연히 ‘적군’일거라고 생각해 부른 게 굳어져버렸다. 이 노래는 학교에서 음악수업을 받는 것과 달리 중대 이하 단위부대별로 장교가 선창한 뒤 병사들이 따라 불렀다. 그래서 일반인들도 따라 부르다 완전히 ‘적군’으로 바뀐 것이다. 이 곡은 또 한때 금지곡이기도 했다.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란 가사가 전쟁 중이던 군인들 사기를 떨어뜨릴 수 있다는 정부의 우려 때문이었다.‘돌아오지 않는 해병’ 영화주제가로 유명이 노래는 1963년 만들어진 영화 ‘돌아오지 않는 해병’의 주제가로도 유명하다. 원곡은 현인 선생이 불렀지만 영화주제가는 남성 노래그룹 ‘별 넷’이 합창했다. <돌아오지 않는 해병>은 한국전쟁영화사에 한 획을 그은 기념비적 작품이다. 남아있는 이만희 감독 작품 중 ‘가장 오래된 필름’이다. 1983년 <7인의 여포로>로 북한을 찬양했다는 혐의로 구속된 적 있는 이 감독 작품으로 인천상륙작전 성공 뒤 북진하던 국군해병대의 한 분대가 극한 상황을 통해 전쟁의 끔찍함과 죽음을 눈앞에 둔 사람의 본능, 전우애를 실감나게 담고 있다. 제작 땐 반공영화로 분류되기도 했다. 하지만 전쟁의 참혹함과 비극, 인간의 본성과 갈등을 사실적으로 그린 이 감독 특유의 주제의식을 엿볼 수 있는 작품이다. 그런 면에서 어쩌면 반전쟁영화의 색채도 강하게 느껴진다. 그 무렵으로선 엄청난 제작비와 제작기간이 걸린 대작이기도 하다. 전우애와 갈등, 전쟁고아의 등장, 클럽에서 일하는 여성들과 병사들 사이의 로맨스 등 감상적 요소들이 곳곳에서 나와 영화를 더 빛나게 한다. 별다른 특수효과 없이 실제로 총탄을 쏘면서 전투장면을 찍은 것을 감안하면 영화의 전투장면은 놀라움 자체다. 전쟁장면을 되살릴 만한 특수효과기술이 부족해 군협조로 전투장면을 되살렸다. 폭탄들이 터지고 실탄을 쏘는 위험하고 어려운 상황에서 질적으로 우수한 작품을 만들어냈다. 첫 도입부분의 상륙장면은 <라이언 일병 구하기>와 비슷하다. 내용은 물론 촬영 등 기술적 부분에서도 많은 성과를 이뤄낸 영화임에 틀림없다. 제3회(64년) 대종상 감독상, 제1회(63년) 청룡상 감독상을 받은 게 잘 말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