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music episode] 호남선의 또 다른 이름’ 돼버린 ‘남행열차’

  • 입력 2009.12.01 00:00
  • 기자명 emddaily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1절)

비 내리는 호남선 남행열차에

흔들리는 차창 너머로

빗물이 흐르고 내 눈물도 흐르고

잃어버린 첫사랑도 흐르네

깜빡 깜빡이는 희미한 기억 속에

그때 만난 그 사람 말이 없던 그 사람

자꾸만 멀어지는데

만날 수 없어도 잊지는 말아요

당신을 사랑 했어요


(2절)

비 내리는 호남선 마지막 열차

기적소리 슬피 우는데

빗물이 흐르고 내 눈물도 흐르고

잃어버린 첫사랑도 흐르네

깜빡 깜빡이는 희미한 기억 속에

그때 만난 그 사람 말이 없던 그 사람

자꾸만 멀어지는데

만날 수 없어도 잊지는 말아요

당신을 사랑 했어요


정혜경 작사, 김진룡 작곡, 김수희 노래의 <남행열차>는 언제 들어도 경쾌하다. 4분의 4박자 디스코 풍으로 춤곡으로도 알맞다. 특히 야구장에서 이 노래는 합창곡으로 인기다. 기아와 롯데는 각각 두 말할 것 없이 <남행열차> <목포의 눈물> <부산 갈매기> <돌아와요 부산항에>다. 경기가 달아오르고 기분이 좋으면 자연스레 나오는 ‘의식’과도 같은 노래다.

<남행열차>를 모르면 전라도 사람이 아니랄 만큼 호남인들의 애창곡이다. <목포의 눈물>과 함께 ‘호남의 2대 애향가’라 해도 손색이 없다. 신나고 흥겨운 가락으로 술자리, 노래방, 수학여행에서 빠질 수 없는 곡이다.?가사내용과 달리 빠른 박자와 경쾌한 멜로디로 앉아 있는 사람을 벌떡 일으켜 세우고도 남는 노래다.

 

호남 사람들의 사랑, 눈물, 이별, 애환 담아

진짜 ‘남행열차’엔 전라도 사람들의 고단하고 애달픈 삶이 실려 있다. 민초들의 사랑, 눈물, 이별, 애환, 슬픔이 녹아있다. ‘남행열차’의 어원은 수학여행과도 무관치 않다. 1922년 동아일보에 ‘광주농업학교 학생들이 수학여행을 위해 남행열차를 타고 목포에 왔다’는 기사가 실렸다. 처음 이 말이 등장하면서 ‘남행열차’는 호남선의 또 다른 이름이 돼버렸다. ‘남행열차=호남선’이란 등식이 알게 모르게 생겨난 셈이다.

<남행열차>는 <정거장>과 함께 기차를 소재로 해서 부른 김수희(56)의 대표 곡이다. KBS라디오가 수도권의 10대들을 조사한 자료에서 그들이 좋아하는 트로트곡 1위로 뽑혔다. 2007년 3월 KBS 해피FM 2라디오 ‘이호섭·임수민의 희망가요’가 공동진행 10주년을 맞아 한 '한국인의 열창 성인가요 30선, 당신의 애창곡은?'이란 조사에서도 1위였다. 영화녹음기사 출신으로 <비 내리는 호남선>을 부른 손인호의 <남행열차>도 있지만 완전 다른 노래다.

남행열차로 상징되는 호남선은 1914년 1월 완공된 256.3km의 철길이다. 대전서 갈라져 논산~익산~김제~송정리~목포로 이어진다. 일제 땐 호남·나주·김제평야 쌀을 서울로 실어 나르는 수탈의 길이었다. 해방 뒤엔 가난을 벗기 위해 도시로 가는 시골사람들 ‘이농열차’이기도 했다.

더욱이 경부선과 달리 ‘소외’ 받은 철길이기도 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 전까지만 해도 그랬다. 종착역인 목포역 광장 포장공사를 1945년부터 철도청이 여러 번 건의했지만 묵살되다 1967년 4월 5일이에야 이뤄졌다. 복선이 된 것도 공사 후 35년 걸렸다. 고속철길 역시 깔리지 않아 지난 7월 24일에야 착공됐다.

그래서 <남행열차> 노랫말처럼 비와 호남선의 열차차창이 우울함, 이별, 소외로 이어지는 건 어쩌면 자연스럽다.


김수희 재기 시킨 ‘보물 곡’

<남행열차>는 1982년에 만들어졌으나 히트한 건 4년이 지나서였다. 같은 해 김수희가 발표한 <멍에>가 공전의 히트를 했지만 대마초파동으로 시련을 겪었다. 그런 가운데 <남행열차>가 선풍적 인기를 끌어 재기할 수 있게 만든 ‘보물 곡’이다. 그 때가 1986년이다.

허스키하고 호소력 있는 목소리가 특징인 김수희는 트로트와 팝, 트로트와 국악의 접목을 꾀해왔다. 조선일보 선정 <건국 이후 가수 베스트50>에서 33위로 진가를 확인했다. 노래방과 술자리에서 단골 곡을 장식하는 <남행열차> 주인공으로서 말이다.

부산이 고향인 김수희는 1973년 작곡가로 음악계에 데뷔했다. 노랫말을 써 작사가로서도 자질을 보인 바 있다. 1953년생으로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어려운 생활을 한 그는 숙명여고를 졸업했다. 어릴 때부터 노래에 남다른 재주를 가져 음악활동을 했다. 밤무대, 미8군 업소 등에서 그룹 블랙 캣츠(Black Cats)의 리드싱어로 활동하다 1976년 데뷔곡 <너무 합니다>가 담긴 첫 앨범을 내고 솔로활동을 시작했다. <남포동 블루스>, 리메이크 곡 <알뜰한 당신> 등이 들어간 이 음반은 별다른 반응을 얻지 못했다.

하지만 타고난 목소리에 끈질긴 노력이 대중들에게 먹혀들었다. 1979년께부터 다운타운을 중심으로 인기를 끌기 시작한 것이다. 이름이 라디오전파를 타고 전국에 알려졌다. 1980년대엔 <너무 합니다> <멍에> <남행열차> 등이, 1990년엔 <애모>가 히트했다. 음악문화의 주도권을 신세대에게 빼앗긴 기성세대를 파고들어 전국을 석권했다. 그는 자신의 이름을 딴 ‘희 레코드사’를 세워 음반을 냈고 종교인으로서 성가곡집도 발표했다. 앨범에서 <애모>를 성가가사로 바꿔 불러 눈길을 모았다.

한편 그녀의 딸 써니(Sunny)는 주영훈 작곡의 <Damage>를 타이틀로 한 데뷔음반을 내놓고 모전여전(母傳女專)의 카리스마를 이어가고 있다.김수희는 다른 가수들과 달리 에피소드가 참 많다. 특이하게도 필리핀의 한 심령사에 의해 유방암치료를 받으며 화제를 뿌렸다. 그 때 모습이 TV방송에 소개되기도 했다.

또 가수에 대한 회의감으로 어릴 적부터 꿈꿔오던 시나리오작가 세계에도 발을 디뎠다. 1980년 <너무 합니다>의 시나리오 집필을 시작으로 1990년엔 영화사 ‘희 필름’을 세워 충무로 영화가에 다가섰다. 1994년 도박사를 소재로 한 영화 ‘애수의 하모니카’ 제작?시나리오?감독까지 1인3역을 해냈다. 소설과 에세이 등을 출간, 작가로서의 명함도 가졌다. 몇 년 전에 피부미용 사업까지 손을 대 새 분야를 개척하는 여장부로서의 과감성을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