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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usic episode] 남녀 간의 진한 사랑 노래‘ 꽃과 나비 ’

가진 것 없다지만 순정은 있어…

  • 입력 2010.05.01 00:00
  • 기자명 emddai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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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진 바람 불어오고 휘몰아쳐도

그대는 나를 지켜주는 태양의 사나이

가진 것이 없다지만 순정은 있어

너와 나는 나와 너는 꽃과 나비지


눈보라가 몰아쳐도 비가 내려도

그대는 나를 지켜주는 태양의 사나이

모든 것이 싫어져도 당신은 좋아

너와 나는 나와 너는 꽃과 나비지


방일매 작사, 김부해 작곡, 방주연 노래의 ‘꽃과 나비’는 남녀의 진한 사랑을 그린 대중가요다. 1970년 방주연이 불러 히트했다. 문화공보부 전국노래자랑대회에서 가창상을 받고 가수로 출발한 그녀의 간판곡이라 할 만큼 인기를 끌었다. 이수미, 정훈희와 인기경쟁을 벌였던 방주연은 시원시원한 목소리로 1970년대 가요팬들을 사로잡았던 오디오형 가수였다. 게다가 ‘꽃과 나비’ 등 수백 곡의 노랫말을 쓴 작사가이기도 하다.


1970년대 중반 인기가수로 ‘우뚝’

<꽃과 나비>에 숨어있는 재미난 얘기들이 많다. 먼저 가사에 얽힌 에피소드다. 1970년 가요계에 데뷔한 방주연이 가수가 되기 전에 써둔 시가 노랫말이 됐다. 여고시절인 1968년 글이 쓰고 싶어 지은 ‘꽃과 나비’란 제목의 시가 가사로 쓰인 것이다. 작사가 방일매는 방주연의 본명이다. 그녀는 작사가 겸 가수로 가요계에 신고식을 올린 셈이다.

또 하나는 노랫말이 문제가 돼 금지곡으로 묶였다는 점이다. 노래발표 뒤 얼마 되지 않아서였다. ‘그대는 나를 지켜주는 태양의 사나이’란 대목에 발목이 잡힌 것이다. ‘태양’은 북한 김일성을 떠올리게 한다는 이유에서였다. 순수한 대중가요가사에 이념을 덧칠하는 당국의 힘은 무소불위였다. 방주연은 히트곡이 묶여버리자 바로 후속곡을 준비했다. 그렇게 나온 곡이 ‘그대 변치 않는다면.’ 하루 만에 작사, 작곡했다. ‘태양의 사나이’ 구절 때문에 피해를 봐 이 노래엔 의도적으로 ‘나는 그대 위해 조용히 살리라’란 구절을 넣었다. 방주연은 1951년 1월 25일 상업을 했던 집안의 2남1녀 중 장녀로 경북 상주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부친의 사업 때문에 부산 해운대로 이사해 자랐다. 해운대초등학교 육상선수였던 그는 초등학교 4학년 때 서울 휘경초등학교로 전학했다. 덕화여중 응원단장으로 학교 명물이었던 그는 2학년 때 덕화여상으로 월반, 부모 몰래 음악학원에 다니며 드럼을 배웠다. 그는 드럼 외에도 가사를 짬짬이 써 1967년 7월 한국음악저작권협회 창작분과위원회 작사가회원으로 가요계에 첫발을 디뎠다. 노래도 잘 불러 고등학교 3학년 때 ‘김부해 가요학원’에서 노래레슨을 받기 시작했다. 하지만 여류학자가 되길 바라는 부모 희망에 따라 서라벌예대 문예창작과에 들어갔다. 대학 1학년 2학기 등록금 미납사건은 지금도 얘깃거리다. 가수 꿈을 버리지 못해 등록금으로 학원비와 음반제작비로 써 집에서 난리가 났다. 나흘간 단식투쟁을 벌이고 방에서 목을 매 자살하려는 딸의 완강한 모습에 부모는 두 손을 들고 말았다. 그 사건 뒤 부친은 ‘주연’이란 예명을 지어주는 협조자가 됐다.

대학을 그만두고 가수활동을 하면서 1969년엔 재일동포위문공연단으로 일본에 갔다. 이때 평론가 서경술의 눈에 들어 데뷔앨범(민해송, 방주연-신세기 1970년)을 내놓으며 가수로 데뷔했다. 데뷔초기 가수로는 예명인 방주연을, 작사가로는 본명인 방일매를 썼다. ‘슬픈 연가’ 등 5곡을 발표하며 트로트가수로 출발한 그는 활달한 성격에 시원한 창법으로 여기저기서 인정받았다. 오아시스레코드사 전속가수로 ‘밤비가’, ‘알고 싶어요’ 등을 발표하고 1970년 12월 자신이 작사한 ‘꽃과 나비’를 처음 히트시켰다. 1971년 9월 양희은, 은희 등 포크가수들이 기세를 올리던 때 그는 작곡가 김영광 씨와 손잡고 포크계열가수로 변신했다. 첫 독집음반에서 타이틀곡 ‘그대 변치 않는다면’, 은희의 ‘꽃반지 끼고’와 제목만 다른 ‘오솔길’을 발표해 젊은 층에 인기였다. 이후 포크 팝 계열과 트로트를 부르며 활동했다. 1972년 초 김영광의 신곡 ‘여고시절’을 놓고 이수미와 신경전을 벌이며 라이벌관계가 됐다. 2월엔 이수미가 ‘여고시절’로, 4월엔 방주연이 ‘당신의 마음’으로 히트하며 접전을 벌였다. ‘당신의 마음’은 아름답고 애틋한 가사와 멜로디로 대중을 파고드는 대표곡이 됐다. 7월에 내놓은 세 번째 독집음반에선 ‘자주색 가방’, ‘기다리게 해놓고’, ‘연화’ 등 3곡이 동반히트하며 상복이 터졌다. 제1회 한라문화제 10대 가수상을 받고 난영가요제의 2회, 3회 잇달아 수상했다. 1973~1976년 TBC 7대 가수 최고 여가수상도 받았다. 그러나 1973년 이후 별다른 히트곡을 내지 못하고 김민기의 ‘아침 이슬’, 황규현의 ‘애원’, 김세환의 ‘토요일 밤’ 등 포크 팝계열의 히트곡들을 리메이크하며 절치부심했지만 내리막길이었다.

1977년 사업가 강현모 씨와 결혼하면서 가요계를 떠났던 그는 양장점 ‘센스패션’을 경영하다 1982년 6월 트로트 곡 ‘공항 대합실’을 발표하고 컴백했다. 이후 이산가족주제가 ‘한 맺힌 정’을 발표했지만 예전의 인기를 되찾지 못했다. 1987년 12월 서울 화양동에 종합미용실을 차려 사업가로 뛰었던 그는 연예인 송출사건에 휘말리기도 했다.


가수에서 자연치유학 박사로 변신

방주연 씨는 요즘 제3의학파동요법 자연치유학 박사이자 ‘셀프 힐링(Self heeling, 자연치유)’ 전령사로 제2의 삶을 살고 있다. 2006년 4월 한국셀프휠링파워연구소장으로 취임해 뛰고 있다. 그의 변신은 결혼 뒤 건강문제로 위기를 맞았기 때문이다. B형 간염, 위궤양 등을 앓던 중 1979년 임파선암 진단까지 받았다. 그럼에도 병원치료를 거부하고 금식과 자연식이요법, 게르마늄요법으로 10년간 투병했다. 결과 완치돼 투병경험을 바탕으로 1993년 서울 서교동에 ‘늘 푸른 生 자연요법센터’를 열어 자연요법연구가로 변신했다. 버나딘대학교 대학원에서 자연치유학을 공부한 뒤 서경대 평생교육원 헬스힐링지도교수(2007년), 한국라이프코치연합회 부회장(2006년)을 지내는 등 보폭을 넓혔다. 경험·체험·연구 자료를 바탕으로 ‘첨단파동요법으로 200세 젊음에 도전 한다’, ‘체질에 맞는 식생활 길들이기’, ‘혈액형과 체질별 식이요법’ 등 책들도 냈다. 2004년엔 ‘혈액형별 식단제공시스템’으로 발명특허(번호0465340)도 받았다. 밥상과학의 중요성을 일깨우기 위한 연구소도 세워 연구와 후진양성에 힘쓰고 밥상과학혁명을 일으킬 준비에도 바쁘다.

노래를 작곡한 김부해 선생은 1918년 9월 25일에 태어나 1988년 7월 13일 오전 한양대부속병원에서 숙환으로 세상을 떠났다. ‘대전 블루스’, ‘유정천리’, ‘눈물의 연평도’, ‘새타령’ 등을 작곡한 그는 서울전매청 취주악대에 입단, 악대장으로 활동하다 가극단 ‘꽃’에서 색소폰연주자로 생활하기도 했다. 작곡을 시작한 건 원로작사가 반야월 씨가 대표로 있었던 ‘남대문악극단’ 주제가를 작곡하면서부터였다. 1953년 신세계레코드사 전속작곡자로 활동하면서부터 작품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1956년 ‘밤비의 블루스’, ‘심야의 탱고’, 1965년엔 가수 김세레나를 ‘새타령’, ‘갑돌이와 갑순이’로 데뷔시켰다. 300여곡을 발표해 가요계 큰 별로 자리를 굳힌 고인은 1958년 ‘김부해 가요학원’을 운영하기도 했다. 1961년 한국연예협회 이사, 1962년 음악저작권협회 감사를 지내는 등 가요계 요직을 거쳤다. 다정다감하고 온화한 성격으로 슬하에 4남 1녀를 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