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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usic Episode]영암인의 고향사랑 담은 곡, ‘영암 아리랑’

  • 입력 2010.08.01 00:00
  • 기자명 emddai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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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이 뜬다 달이 뜬다

영암 고을에 둥근달이 뜬다

달이 뜬다 달이 뜬다

둥근 둥근 달이 뜬다

월출산 천왕봉에 보름달이 뜬다

아리랑 동동 쓰리랑 동동

에헤야 데헤야 어서와 데야

달 보는 아리랑 임 보는 아리랑

풍년이 온다 풍년이 온다

지화자자 좋구나

서호강 몽해 들에 풍년이 온다

아리랑 동동 쓰리랑 동동

에헤야 데헤야 어서와 데야

달 보는 아리랑 임 보는 아리랑

흥타령 부네 흥타령 부네

목화 짐 지고 흥겹게 부네

용칠도령 목화 짐은

장가 밑천이라네

아리랑 동동 쓰리랑 동동

에헤야 데헤야 어서와 데야

달 보는 아리랑 임 보는 아리랑

우리나라 가요 중 지역이나 지명을 소재로 한 게 많다. ‘서울의 찬가’, ‘인천은 항구다’, ‘목포의 눈물’, ‘대전 블루스’, ‘돌아와요 부산항에’ 등 찾으면 아주 많다. 그 노래엔 지역의 명소나 특징적인 곳들이 나온다. 산, 강, 섬, 꽃, 역, 항구 등 다양하다.

하춘화가 부른 ‘영암아리랑’도 만찬가지다. 월출산 천황봉, 서호강 몽해(夢海)들이 가사에 들어있다. 전남 영암군 지역의 대표 산, 들, 강이 노랫말에 등장한다. 영암군가라 할 만큼 영암사람들은 이 노래를 즐겨 부른다. 백암(이환의) 작사, 고봉산 작곡, 하춘화 노래의 ‘영암 아리랑’은 신민요 풍이다. 4분의 4박자 타령이다.

이환의 전 MBC 사장이 작사

노래가 만들어진 건 지금으로부터 40년 전으로 영암출신 사람들의 고향사랑에서 비롯됐다. 특히 가수 하춘화 씨(55) 아버지(하종오·90)가 노래탄생의 중심에 있다. 사업과 정치 쪽에서 활동했던 하종오씨는 고향사랑에 대한 애착이 강했다. 그와 함께 현재 영암군수인 김일태 씨 등도 뜻을 같이 해 노래 만들기에 팔을 걷어 붙었다. ‘영암을 어떻게 하면 전국에 알릴 수 있을까’ 생각하던 차에 노래를 만들기로 한 것이다. 특히 젊은 나이에 고향을 떠나 부산, 서울 등지에서 생활한 하 씨는 딸 하춘화가 일찍부터 유명가수가 되자 고향을 널리 알려야겠다고 맘먹고 작사가, 작곡가, 레코드사를 찾고 고르는 데 앞장섰다.

1970년 들어 영암노래의 가사와 곡을 공모했다. 수십 명이 노랫말을 보내고 곡을 만들어 응모했다. 그러나 마음에 드는 게 없었다. 그러던 중 어느 날 의미 있는 자리가 서울서 마련됐다. 1971년 영암산악회 회원들이 영암출신인 이환의 MBC 사장을 만나는 기회가 있었다. 그 때 영암 노래얘기가 나왔다. 김일태 군수가 그 무렵 영암산악회 부회장을 맡고 있었다. 김 부회장 등 산악회원들은 영암을 알리는데 고향선배인 이 사장께서 힘써줄 것을 부탁했다. 이 사장은 영암을 알리는 데 ‘노래가 가장 좋겠다’며 후배들 요청을 받아들여 가사를 썼다. 가요집에 적혀 있는 작사가 ‘백암’은 이 사장의 아호다. 여기에 고인이 된 작곡가 고봉산 선생이 곡을 붙였다.

노래는 1972년 영암출신 가수 하춘화 씨가 취입했다. 하춘화가 17살 때로 아버지의 아이디어로 태어난 ‘영암 아리랑’을 불러 인기가도를 달렸다. 지구레코드사에서 만든 음반은 영암을 비롯하여, 전국적으로 대박을 터뜨렸다. 뛰어난 창법과 그 때만 해도 독특한 작곡기법인 카댄자(Cadenza)가 노래 앞부분에 들어가 눈길을 끌었다. 노래가 시작되기 전에 ‘달이 뜬다 달이 뜬다 영암고을에 둥근달이 뜬다’ 대목을 길게 늘어뜨려 빼며 부르는 과감한 시도를 해 다른 가요들과 차별화를 해 성공했다. 하춘화 씨는?1972년 ‘영암 아리랑’의 대히트로 MBC 가수왕의 영예를 안았다.

월출산에 달 떠는 모습 형상화

그로부터 38년이 지난 올 7월 1일 영암군 영암읍 월출산 자락의 기찬랜드에 ‘영암아리랑’ 노래비가 섰다. 높이 4.3m의 비 위쪽엔 ‘영암노래 하춘화 노래비’란 글씨가 새겨졌고 아래쪽 가운데 동그란 검정색 돌 바탕에 노래 2곡(영암아리랑, 월출산 연가)의 가사가 적혀 있다. 전남대 최규철 교수가 제작한 이 비는 월출산 모습에 오선(五線)으로 리듬감을 줘 흥겹게 춤을 추는 모양이다. 노랫말에 나오는 월출산에 둥근 달이 떠오르는 모습을 형상화한 것이다. 좌대에 놓인 돌은 영암 들판의 풍성한 곡식을 상징한다. 영암군과 ‘하춘화 노래비 기념사업추진위원회’가 마련한 노래비 제막식엔 민선 5기 군수의 첫 업무를 시작한 김일태 영암군수, 하춘화 씨, 하종오 씨, 주민들이 참석했다. 하춘화 씨는 “영암 아리랑의 작은 노래비들은 있었으나 이번에 ‘하춘화의 노래비’란 이름으로 세워졌다”면서 “영암군민들이 지역을 널리 알린 데 대한 감사의 뜻으로 세워주는 것이어서 뜻이 깊다”고 말했다.

국민가요로 불리는 ‘영암아리랑’이 또 한 번 대중 속을 파고드는 기회를 맞았다. 국내 최초로 산수뮤지컬로 만들어져 2012년 월출산 사자봉과 사자저수지 위에서 산수 극으로 공연될 예정이다. 제작은 영아트테인먼트(대표 백광준)가 맡고 관련시설은 영암군이 투자해 국가브랜드공연을 목표로 준비가 한창이다.

1955년 부산 영도에서 태어난 하춘화는 6살 때인 1961년 ‘효녀심청이 되오리다’(오종하 작사, 형석기 작곡)를 취입, 가요계에 데뷔했다. 지금까지 취입한 노래는 약 2500곡. 15~16살 땐 한해 11장의 음반을 냈을 만큼 많이 불렀다. 어릴 때부터 300여곡의 가사를 외워 꼬마천재가수로 화제가 된 그는 1971년 발표한 ‘물새 한 마리’가 크게 히트해 인기가수로 확 떴다. 이어 신민요인 ‘영암 아리랑’, ‘잘 했군 잘 했어’, ‘강원도 아리랑’, ‘새 타령’ ‘꽃 타령’을 불러 스타덤에 올랐다. ‘하동포구 아가씨’, ‘연포 아가씨’, ‘알고 계세요’, ‘이슬비’, ‘날 버린 남자’ 등 히트곡들이 수두룩하다. ‘잘 했군 잘 했어’ 음반은 300만장이 팔린 기록을 세웠다.

최연소가수 데뷔, 최다 무대공연 기네스북

하춘화는 여러 기록과 별명을 가진 가수이기도 하다. 올해로 가요계 생활 49년을 맞은 그는 국내 최연소가수로 데뷔, 최다무대공연 기네스북 등재, 박사 가수 등의 기록을 갖고 있다. 트로트여왕, 왕눈이 등의 애칭과 별명도 인기를 말해준다. 1977년 이리역 폭발사고 때 코미디언 이주일의 도움으로 살아난 일, 레슬링선수 역도산의 수양딸로 가려다 일본에 귀화하는 게 싫어 그만둔 일은 흥미롭다. 딸만 4명인 집안에서 둘째인 그는 2006년 성균관대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아 또 한 번 화제가 됐다. 4자매 중 3명이 박사다. 그는 고향에 대한 사랑이 깊어 영암에 고등학교가 없어 광주나 목포로 유학 가는 것을 알고 낭주고를 세웠다. 낭주는 영암의 옛 지명이며 낭주고는 요즘 2년제 대학으로 바뀌어 운영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