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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usic Episode]우리나라 최초의 신민요, ‘노들강변’

  • 입력 2011.02.01 00:00
  • 기자명 emddai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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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들강변 봄버들~ 휘늘어진 가지에다가~”

맺힌 한(恨) 물에 띄워 보내려는 심정 읊어

도·레·미·솔·라 5음계로 경쾌하고 애조 띤 가락

글 왕성상

노들강변 봄버들 휘늘어진 가지에다가

무정세월 한허리를 칭칭 동여 매어나 볼까

에헤요 봄버들도 못 믿을 이로다

푸르른 저기 저 물만 흘러 흘러서 가노라

노들강변 백사장 모래마다 발은 자국

망고풍산 비바람에 몇 번이나 지나갔나

에헤요 백사장도 못 믿을 이로다

푸르른 저기 저 물만 흘러 흘러서 가노라

노들강변 푸른 물 네가 무슨 망령으로

재자가인 아까운 몸 몇몇이나 데려 갔나

에헤요 네가 진정 마음을 돌려서

세상 쌓인 한이나 두둥 싣고서 가거라니라

민요 ‘노들강변’은 4분의 3박자 세마치장단으로 언제 듣고 불러도 흥겹다. 가락이 흘러나오면 어깨가 들썩여지는 우리 토박이노래말로 감칠맛이 더 난다. 오케레코드사 창립 1주년 기념작으로 발표된 ‘노들강변’은 오케의 중심작곡가였던 문호월이 작곡하고 만담의 일인자로 활약하던 신불출이 작사했다. 경기민요 명창으로 많은 민요음반을 취입한 박부용이 불렀다. 음반으로 취입돼 발표된 건 1934년 2월. 꼭 77년 전 일이다.

음악사에 남을 불멸의 민요곡

‘노들강변’은 서민들의 사랑을 받아 우리나라 음악사에 남을 불멸의 경기도민요다. 1930년대 작곡가 이면상과 음악전문가들이 협의를 거쳐 이 노래를 ‘신민요 1호’ 작품으로 결정했다. 오케레코드사도 이 노래가 담긴 음반을 신민요의 시조라고 광고했다. 그만큼 의미가 있는 곡으로 잔치, 축제행사 등엔 빠지지 않는다.

신민요로 등장했으나 차츰 일반 민요화됐다. 널리 불리면서 무용곡으로도 쓰이고 있다. 신민요 초기형태는 새 곡을 창작하기보다 널리 알려진 민요에 가사를 새로 붙이거나 곡조를 양악 풍으로 손질하고 서양악기로 반주하는 게 대부분이었다. 많은 유행가 가수들이 이런 식으로 신민요를 부르고 취입했다.

‘노들강변’은 경쾌하면서도 애조 띤 가락으로 맺힌 한(恨)을 물에 띄워 보내려는 심정을 읊었다. 노랫말 내용은 약간 유흥적인 맛이 난다.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졌다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나라를 빼앗긴 허탈감이나 무기력에서 비롯된 우리 겨레의 정서는 음반으로 팔리면서 더 심해졌다. 이런 흐름은 일제 때 많이 불린 ‘노랫가락’, ‘창부타령’ 등의 비기능적인 민요나 많은 수의 신민요들도 마찬가지다.

장단은 9박의 세마치이고 곡 스타일은 3절로 된 유절형식(有節形式)이다. 특히 동양의 5음계인 궁상각치우(宮商角徵羽, 도·레·미·솔·라)로 만들어졌다. 도선법 곡(음계가 ‘도’로 끝나는 노래)으로 경기민요 특징을 갖고 있다.

‘노들강변’은 신민요 정착에 획기적 역할을 한 작품으로 평가 받고 있다. 경기민요 중에서도 친숙한 ‘노들강변’은 국악방송에서 자주 들을 수 있고 음악교과서에도 실려 우리의 전통 민요로 인식되기에 이르렀다. 창작곡이 전통음악으로 바뀐 좋은 사례다.

음반과 함께 나온 가사지가 지금까지도 여러 종류 남아 있음을 보면 음반이 재판을 거듭하며 판매고를 꽤 올렸을 것으로 보인다. 흥겨운 가락도 그렇지만 ‘노들강변’의 독특한 멋은 가사전체를 통해 유유히 흐르는 달관한 듯한 무상감에서 뚜렷이 느낄 수 있다.

‘노들강변’ 곡명은 서울시 동작구에 있는 노량진과 관련이 깊다. ‘노량’은 백로 로(鷺)에, 징검돌 량(梁)이다. 예전엔 노량진에서 양화진까지 버드나무가 많았다. 특히 노량진엔 백로가 많이 날아와 ‘노들’이라 불렸다. 여기에 ‘강변’을 더해 곡명으로 삼은 것이다. 지금의 노량진은 조선시대 때 한양과 남쪽지방을 잇는 중요한 나루터였다. 음악인들은 서민들의 애환이 깃든 나루터 ‘노들강변’을 자연스럽게 민요의 소재로 삼았다.

작사가 신불출, 음악인이자 문인, 예술인

여기서 눈길을 끄는 사람은 노랫말을 쓴 신불출(申不出, 1905년~?). 만담가로도 유명했던 그는 일제강점기 때 풍자와 해학으로 당대 최고인기를 얻었던 음악인이자 문인, 예술인이다. 그의 만담음반 또한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시중에 나오자마자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날카로운 풍자와 해학이 나라 잃은 백성의 울분을 달래주면서 그를 최고의 이야기꾼위치로 올려놨다. 1945년 일제로부터 해방이 되자 좌익성향이던 그는 평양에서 조선문학예술총동맹(문예총) 중앙위원을 지내며 직속기관인 ‘신불출만담연구소’ 소장으로 활동했다. 그러나 1960년대 초 한설야, 최승희 등과 숙청된 것으로 알려졌다.

본명은 남한기록엔 신영일 또는 신흥식. 북한자료엔 신상학이라 돼있다. 북한 책에 실린 필명은 ‘불면귀’로 연극에서만 이 이름을 썼다고 적혀 있다. 출생지도 불분명하다. 고향은 개성이라 알려졌으나 북한 책(2003년 평양출판사)은 서울서 태어나 개성으로 이사 간 뒤 보통학교에 입학한 것으로 기술했다.

신불출은 특유한 화술로 대중의 인기를 끌었다. 하지만 일제에 노골적으로 맞서면서 툭하면 끌려가 조사를 받았다. 인기가 높던 그의 음반은 자주 불온작품으로 걸려 판매금지를 당했다. 만담작품 ‘말씀 아닌 말씀’엔 민족의식이 숨어있다. “사람이 왜 사느냐가 문제인 것이 아니라 어떻게 살 것인지가 문제다. 그러므로 우리는 ‘왜’자(字)란 것을 아예 없애버려야 한다”는 내용이다. 일본을 뜻하는 ‘왜(倭)’자와 중의법을 써서 ‘왜놈을 없애야 한다’는 뜻을 전하고자했던 것이다. 그의 이름에도 애국심이 배어있다. ‘불출(不出)’로 바꾼 건 ‘이렇게 일본 세상이 될 줄 알았더라면 세상에 나오지 말았어야 했다’는 뜻에서 지었다고 한다.

일본의 수탈에 고통 받던 민중들은 신불출의 만담으로 울분을 달랬다. 일제에 간접적으로 맞서면서 민중들을 보듬었던 그는 독립투사임에 틀림없다. 그의 만담집 ‘대머리백만풍’은 유명하다.

신불출은 유행가 작사로 많은 작품을 남기고 있진 않으나 당시 잡지엔 그의 시조작품이 자주 발견되고 있다. 말재주는 물론 글재주가 상당했다. 그가 취입한 많은 만담음반에서 느낄 수 있는 해학과 비판의식, 월북 등의 행적을 볼 때 ‘노들강변’ 노랫말도 그저 흔한 신세타령으로만 흘려버릴 수는 없을 듯하다.

노래 인기 끌자 후속곡, 영화도 나와

‘노들강변’이 큰 인기를 끌자 1940년 재발매음반이 나왔다. 후속편 곡들이 발표된 것이다. 선우일선 뒤를 이어 1930년대 말부터 신민요 여왕으로 인기를 누린 이화자의 노래 ‘신작노들강변’이 그것이다. ‘신작노들강변’ 곡조가 원작 ‘노들강변’ 것을 그대로 쓴 것인지는 확인된 바 없지만 노랫말은 작사가 조명암이 썼다. 오케레코드사의 대표적 가수 겸 작곡가 김해송은 ‘노들강변’ 가사에 재즈풍의 곡을 붙이기도 했다. 코미디언 겸 가수였던 이복본이 무대에서 자주 불러 지금까지도 또 하나의 ‘노들강변’이 원작 ‘노들강변’과 함께 전해지고 있다.

1957년엔 같은 제목의 영화까지 나왔다. 영화 ‘노들강변’(The No-Deul Riverside)은 액션감독 신경균 씨가 메가폰을 잡은 멜로물이다. 정득순, 하연남, 허장강, 김을백 씨 등이 출연한 영화는 농촌의 머슴(김을백)과 주인집 딸(하연남)이 사랑하는 사이로 그려지는 내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