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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allery]'프랑스 국립 베르사이유 특별展’을 보고

  • 입력 2013.12.01 00:00
  • 기자명 emddai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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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한 추위가 매섭다고 하는데 정말 요즈음 겨울 날씨는 미쳤다고 매스컴에서 야단이다.

강추위와 폭설, 세계가 기상 이변으로 곳곳에서 생지옥을 연출 하고 있으며 오늘도 대관령은 영하17도 서울도 아침 영하10도를 오르내리며 그 기세가 꺾일 줄 모른다. 며칠 전부터 미술을 전공한 큰딸이 예술의 전당에서 ‘베르사이유 특별전’을 한다고 같이 가자고 조른다.  추위가 매서워 나들이가 겁나 좀 날씨가 풀린 다음에 가자고 했으나 승용차로 정중히 모신다고 하니 속마음으로는 무척 반갑고 좋았다.

젊은 시절 등산 약속은 ‘비가 오나 눈이 오나’인데 지금 내 형편으로는 혼자 다니는데 이골이 난 신세 이고 보면 감지덕지한 처지가 아닌가. 옷을 단단히 껴입고 큰사위와 함께 셋이서 오전에 집을 나섰다.

베르사이유 궁은 프랑스 역사를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상징적인 곳으로 우리나라의 이조 500년의 시기와 거의 같고 루이 14·15·16세에 걸쳐 문화와 학술적으로 번영한 때 이었으며 우리의 세종대왕에 버금가는 찬란한 번영을 구가했던 시대이고 유럽문화의 중심국의 위치에 있어 세계 각국에 문화, 미술, 음악, 사상, 교육 등의 모든 면에서 영향을 끼쳤다.

유럽 여행 시에 불란서의 베르사이유 궁 관광은 필수 코스로서 필자도 여러 번 가보고 궁 안의 화려한 치장과 사치의 극치를 보고 프랑스 4월 혁명이 왜 일어났는가를 실감하고 저 유명한 루이 16세의 왕비인 ‘마리 앙투아네트’가 콩코르드 광장에서 카로틴의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진 이유를 이해 할 만 했다. 루이 14세는 루이 13세의 통치가 끝날 무렵에 태어나 겨우 다섯 살 나이에 왕위에 오르며 대부였던 마자랭 추기경이 나라를 다스리고 스페인 공녀이자 사촌인 마리 테레즈와 혼인을 하게 된다.

1661년에 재상(宰相)인 마자랭이 세상을 떠나고 직접 나라를 다스리고 이 친정 체제를 훗날 ‘절대 왕정’이라 불리고 루이 14세는 스스로 “내가 국가다” 라는 유명한 말을 남긴 절대 군주였다. 베르사이유 궁전은 원래 1624년 루이13세가 작은 별장으로 짓도록 한 것을 1631년 작은 궁으로 증개축 되고 루이 14세 때에 대대적으로 증개축 하고 자신을 ‘디유도네(신이 보내준 왕이라는 뜻)’라고 부르게 하고 웅장하고 위엄 있는 표상으로 태양왕에 걸맞게 베르사이유 궁을 꾸미게 한 그였으며 그리고 이시기에는 예술과 과학, 학문의 진흥에 많은 지원을 하여 찬란한 권력을 누린 흔적들을 보게 된다.

현재의 모습으로 되기까지는 그 후 약 100여년이 걸렸고 궁내부에는 226개의 거처와 450개에 달하는 방이 있으며 최대 5000명이 이곳에 거주하였다고하며 프랑스 절대왕권의 전성기를 상징하고 있으며 1979년 유네스코에 의하여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 되였고 지금은 프랑스 최대의 박물관으로서 또한 최대 관광지로 자리하고 있다.

루이 15세, 프랑스 예술의 절정기이다. 국정이 안정기로 접어들어 단단한 권력기반으로 통치하였다. 루이 15세도 루이 14세와 마찬가지로 어린나이에 루이14세의 뒤를 이었다. 루이 14세의 손자인 부르고뉴 공작의 아들 앙주 공작 루이는 1715년에 증조부인 루이 14세의 뒤를 이어 루이 15세가 되었다.

섭정공 오를레앙의 권유로 10살 때부터 국정회의에 참석하고 정치수업에 충실이 대비하였고 플로리가 국정을 보좌했던 시절이 프랑스가 새롭게 도약했던 시기이며 화려한 왕실문화를 만들어 나갔다. 이 시기에 화려하고 우아한 프랑스 로코코 미술을 볼 수 있다. 그가 사망 한 후 루이15세에게 중대한 전환점이 찾아오게 되었다.

또한 루이 15세의 손자로 장래가 촉망한 부르고뉴 공작이 열 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 프랑스 국민들은 국가 부흥에 대한 희망을 모두 잃게 되고 루이 15세의 종막을 예고하게 된다. 절대왕권을 회복하기 위하여 파격적인 개혁을 단행하였으나 1745년 루이 15세가 급성천연두로 세상을 뜨게 된다.
루이 16세는 루이15세의 손자로 어린 나이에 부모형제가 일찍이 세상을 떠나 11세의 나이로 왕위 계승자가 되었다.

이 왕세자는 오스트리아 황제의 대공 여인 마리 앙투아네트와 정치적인 결혼을 하게 되고 프랑스 왕실의 미래를 지켜줄 왕위 계승자를 낳으므로 왕비의 책무를 완수한다. 화려함의 대명사 마리 앙투아네트는 궁정문화의 발전과 예술에 공헌하여 고급문화가 화려하게 핀 베르사이유 역사를 다시 쓰게 하였다.

그녀의 사치스러운 소비는 그녀로부터 소외된 인사들에 의하여 갖은 험담과 낭비부인, 사악한 왕비로 불리고 정치 경제적인 위기가 심화 되어 왕실에 대한 국민의 여론이 악화 되어 결국 국민의 봉기로 프랑스 4월 혁명으로 감옥에 투옥, 1793년1월에 루이 16세를 비롯하여 왕비인 마리 앙투아네트도 단두대로 처형 되어 공동묘혈에 버려졌다.

이 전시회를 보고 나오면서 옛날 촉박한 일정 속에 수박 겉핥기식으로 베르사이유 궁을 보았던 것을 이번 기회에 한층 더 깊게 많은 것을 감상 했고 보람 있는 하루였다고 생각하고 특별전을 마련한 주최 측의 수고에 마음속 깊이 찬사를 보낸다.

본 원고는 필자의 집필 시기와 게재시기가 다를 수 있습니다.

[글, 사진 / 최단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