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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usic Episode] 6·25가 낳은 가슴 아픈 이별 이야기, ‘님’

  • 입력 2011.04.01 00:00
  • 기자명 emddai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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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숨보다 더 귀한 사랑이건만창살 없는 감옥인가 만날 길 없네왜 이리 그리운지 보고 싶은지못 맺을 운명 속에 몸부림치는 병들은 내 가슴에 비가 내린다서로 만나 헤어질 이별이건만맺지 못할 운명인 걸 어이 하려나쓰라린 내 가슴은 눈물에 젖어애달피 울어 보아도 맺지 못할 걸차라리 잊어야지 잊어야 하나차경철 작사, 한복남 작곡, 박재란 노래의 ‘님’은 남녀의 애틋한 사랑과 그리움을 담은 대중가요다. 연인을 그리워하면서도 만날 수 없는 상황을 탱고리듬으로 담아냈다. 1963년 도미도 레코드사에서 음반으로 만들어져 대중 속을 파고들었다. 이듬해 본격 선보인 이 노래는 부제목인 ‘창살 없는 감옥’으로 더 많이 알려졌다. ‘님’ 노래가 히트하자 가사에 나오는 ‘창살 없는 감옥’을 제목으로 한 영화가 상종가를 쳤기 때문이다. ‘창살 없는 감옥’은 그 무렵 문화공보부가 밀어준 반공영화다. 6·25전쟁과 휴전(1953년 7월 27일) 후 남북이념 대결이 심했을 때로 민초들의 심금을 울렸다. 작사가 차경철 씨 고향 울산 온양읍에 노래비강범구 감독이 만든 이 영화는 황해(가수 전영록 씨 아버지)와 이경희 씨가 주연을 맡았다. 줄거리는 1950년 6·25전쟁이 터지면서 빚어진 남녀사랑과 이별이야기를 그렸다. 사랑하는 남편이 전쟁터에 나가고 아내는 그를 무척 그리워한다. 전쟁 통에 쫓겨 다닌 부부는 잠깐 만나고 헤어지는 뜨내기신세가 됐다. 특히 실수로 빚어진 살인 때문에 세상을 떠날 때까지 창살 없는 감옥에서 살 수 밖에 없었던 남편의 가슴 아픈 사연이 눈물샘을 자극한다. 그를 뒤쫓는 형사로 배우 이향이 등장한다. 섬뜩한 인상만큼 악랄한 연기를 보여줘 개성이 강한 연기자로 눈길을 모았다. ‘눈물의 여왕’이라 불린 이경희 씨는 남자주인공과 사랑을 나누는 비련의 여주인공으로 나온다. 영화 삽입곡으로 여가수 백설희가 부른 ‘아메리카 차이나타운’이 흘러나와 이채롭다. 영화가 1964년 대만으로 수출되면서 백설희 노래가 그곳에서 크게 히트했던 일화가 지금까지도 전해져온다. ‘창살 없는 감옥’은 1960년대 학생들에게 이념교육을 위한 반공 홍보용으로 활용됐다. 당국에서 중·고생들에게 단체관람토록 한 게 이를 뒷받침해준다. 많은 사람들이 보도록 오전에 영화 관람료를 깎아주는 조조할인제로 학생들 주머니부담을 덜어줬다. 이 영화는 1970년 이후 KBS, MBC, EBS 등 국내 TV방송에서 추억의 명화로 몇 차례 방영한 적 있다. ‘님’ 노래를 만든 차경철 씨는 동아일보 기자출신이다. 울산광역시 울주군 온양초등학교를 졸업한 그는 언론인으로서 노랫말을 써 화제가 됐다. 그는 한복남 작곡, 손인호 노래의 ‘남원 땅에 잠들었네’란 노랫말도 썼다. 이 노래는 1960년 4.19혁명을 주제로 한 곡이다. 노래가 히트한 뒤 세월이 꽤 지났으나 작사가 차경철 씨 고향마을엔 노래비가 세워졌다. 2001년 5월 12일 울산시 온양읍 망양리 상대마을 대운산 입구에 우뚝 선 비는 온양읍 편찬위원회가 주관해 만들고 울주군이 후원했다. 건립과정엔 우병구·차현철 씨의 공이 컸다. 큰 바위로 된 비엔 ‘차경철 노래 말 비’. ‘님(창살 없는 감옥)’이란 제목아래 1절, 2절 가사가 양 옆으로 검은 색 글자로 깊이 새겨져있다. 비는 대운산 계곡 아래 제1공영주차장에서 길손을 맞고 있다. 가수 박재란, 육군본부 군예대 출신‘님’을 부른 ‘꾀꼬리 가수’ 박재란(본명 이영숙)은 빼어난 미모에다 끼로 뭉친 연예인이다. 데뷔 때부터 최고전성기였던 1960년대 중반까지 국내서 가장 많은 100여종의 음반에 얼굴이 실렸다. 그는 16살 때부터 무대에 섰다. 교회에서 오르간반주를 하던 부친(이수천 씨)와 성가대원이었던 모친(유순남 씨) 사이의 1남5녀 중 4녀로 서울서 태어났다. 4살 때 철도국에 다니던 아버지가 천안으로 직장을 옮기는 바람에 그곳으로 이사 갔다. 천안 제일초등학교(천안초등학교), 천안여중을 거치는 동안 음악적 재능이 남달랐다. 인천경찰악대장이었던 박태준 씨는 그에게 무대 활동을 권했다. 박재란은 박 대장 추천으로 육군본부 군예대(KAS) 3기생으로 뽑혀 대구서 처음 무대에 섰다. 수양아버지로 인연을 맺은 박 대장으로부터 ‘박재란’이란 예명도 받았다. 장병위문공연을 주로 했던 군예대에서 박재란의 역할은 노래, 무용, 악극 등으로 전천후 대원이었다. 쇼의 모든 걸 소화해야했던 그는 대구서 2년, 서울서 2년간의 군예대생활을 거치면서 무대에 빨리 적응했다. 그 때 대구서 처음 취입해 발표한 노래가 나화랑 작곡의 ‘뜰아래 귀뚜라미’와 김학송 작곡의 ‘코스모스 사랑’. 그는 트로트풍 노래를 거의 부르지 않았다. 폴카, 트위스트, 룸바, 탱고, 삼바, 차차차 등 신나는 멜로디들이었다. 첫 히트곡 ‘럭키모닝’을 시작으로 ‘푸른 날개’, 민요풍의 ‘맹꽁이 타령’, ‘님’, ‘둘이서 트위스트를’, ‘산 너머 남촌에는’, ‘소쩍새 우는 마을’, ‘ 아나 농부야’, ‘밀짚모자 목장아가씨’, ‘행복의 샘터’, ‘진주조개 잡이’, ‘강화도령’ 등 SP시대에서 출발해 LP시대를 수놨던 히트곡들은 템포가 제각각이다. 바이브레이션을 쓰지 않는 맑은 창법으로 장르에 따라 발성을 달리하는 뛰어난 가창력이 돋보였다. 전국을 누비던 ‘박재란 쇼’는 늘 관객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그는 영화에도 출연했다. 1959년 박종호 감독이 만든 ‘비오는 날의 오후 세시’에서 미남·미성가수 손시향과 특별출연, 주제가를 부르며 연기했다. 1961년엔 ‘천생연분(박성호 감독)’에선 주연으로 열연했다. 방송, 영화, 노래취입, 공연 등 바쁜 나날을 보내던 시절 하루에 30곡의 노래연습과 취입을 해야 하는 등 무리한 일정으로 폐가 나빠져 약으로 버텼다. 그렇게 되기 전까지 그의 유년시절은 힘들었다. 잔병치레가 잦아 7살 때 ‘뇌염’이 걸려 장례 치를 준비까지 했다.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의사를 불렀을 때 다행히 살아났다. 6·25전쟁 중이던 그의 나이 10살 때 부친마저 잃었다.가수 박성신씨는 박재란 딸 그에겐 운명의 만남도 있었다. 1959년 영화주제가 ‘장마루촌의 이발사’를 연습하기 위해 작곡가 김광수 씨 집에 갔다가 남편 박운양씨를 알게 됐다. 동갑이자 성균관대 학생이었던 박 씨는 작곡가 겸 연주인 김광수 씨가 출연하는 ‘무학성 카바레’의 단골로 의형제를 맺은 사이였다. 그와의 사랑이 시작되면서 행복과 불행이 동시에 찾아왔다. 둘 사이에서 난 딸이 1989년 ‘한번만 더’로 인기를 모았던 가수 박성신이다. 아울러 남편이 영화제작에 손을 댔다가 사기를 당하면서 어려움이 시작됐다. 이를 만회하기 위해 쇼 단을 만들어 전국공연에 나서기도 했지만 일어서지 못했다. 서울 후암동 2층 집에서 용산 단층집으로, 또 갈현동 전셋집으로 옮기며 가세가 기울었다. 설상가상 부부간의 불화로 갈라서 1973년 혼자 미국으로 떠났다. LA에 도착한 그는 나이트클럽 ‘타이거’에서 노래를 부르며 재기에 안간힘을 썼다. 한국을 오가며 음반을 발표하고 방송에도 모습을 드러냈지만 오래 못 갔다. 미국시민권을 가진 연예인들이 가끔 와서 활동하는 것에 대해 ‘국고를 해외로 빼돌린다’는 투서로 국내활동이 끊겼고 대중들로부터도 잊혀져갔다. 더구나 1979년 아파트에 불까지 나 모든 걸 잃었다. 밑바닥까지 내려간 그는 한 때 악성위궤양으로 음식물을 삼킬 수 없는 상태에 이르렀으나 지금은 선교활동을 하며 ‘노래하는 전도사’로 새 삶을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