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music episode]‘뜸북뜸북 뜸북새 논에서 울고~’

  • 입력 2011.11.01 00:00
  • 기자명 emddaily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뜸북뜸북 뜸북새 논에서 울고뻐꾹 뻐꾹 뻐꾹새 숲에서 울 때 우리오빠 말 타고 서울 가시며비단구두 사가지고 오신다더니 기럭기럭 기러기 북에서 오고귀뚤귀뚤 귀뚜라미 슬피 울건만 서울 가신 오빠는 소식도 없고 나뭇잎만 우수수 떨어집니다최순애 작사, 박태준 작곡의 ‘오빠 생각’은 동시(童詩)에 곡을 붙여 만든 동요다. 노래가 불리기 시작했던 때는 86년 전으로 우리나라가 일제식민통치를 받던 무렵이다. 아마 이 동요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성싶다. 국민가요 수준에 이른 이 동요를 노래한 가수만 해도 여럿이다. 대중가요 못잖게 남녀노소, 나이, 계층에 관계없이 널리 불려서다. 8분의 6박자, 스카팅 왈츠로 노래를 부르거나 들으면 왠지 슬픈 느낌이 든다.노랫말이 먼저 만들어지고 그해 작곡돼 선을 보인 이 노래의 탄생배경은 이렇다. 1925년 보통학교 4학년이던 11세 소녀 최순애(崔順愛, 1914~1998년)가 오빠를 기다리는 마음을 ‘어린이’ 잡지 11월호에 투고, 입선을 했다. 소파 방정환 선생이 1923년 창간한 잡지에 실린 이 시의 제목은 ‘오빠 생각.’ 시가 12살 소녀가 썼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이는 그리 많지 않을 듯싶다.1922년 ‘고향의 봄’을 작곡한 대구 출신 박태준(朴泰俊, 1900~1986년)은 이 시를 보고 ‘오빠 생각’을 작곡했다. 그 때 25살이었던 박 씨는 대구계성학교 음악선생으로 근무 중 우연히 잡지를 보고 곡을 붙이게 됐다.박태준은 1920년부터 동요작곡에 뜻을 두고 틈틈이 작품을 써 모았다. 작곡자로 이름을 본격 알린 건 1925년부터다. ‘오빠 생각’ ‘오뚜기(윤석중 작사)’, ‘집 보는 아기의 노래(윤석중 작사, 훗날 노래제목이 ‘맴맴’으로 바뀜)’ 등 주옥같은 곡들이 많다. 박태준, 2절 끝 구절 작곡 땐 ‘눈물’‘오빠 생각’은 초여름 야산에서 흔히 들을 수 있는 뜸부기와 뻐꾸기 울음소리를 통해 오빠를 기다리는 소녀의 가냘픈 마음과 가을이 되면 구슬피 울며 남녘으로 날아가는 기러기, 우수수 떨어지는 낙엽을 보며 오빠에 대한 사무친 그리움을 노래하고 있다.박태준은 후일담으로 그 때의 심정을 들려줬다. ‘서울 가신 오빠는 소식도 없고 나뭇잎만 우수수 떨어집니다’란 2절 마지막 구절을 작곡할 땐 떨어지는 눈물로 5선지를 다 적셨다고 회고했다. 일제로부터의 해방소식은 없고 혹독한 시련만 더해지는 그 무렵 우리 민족의 아픔이 은유적으로 잘 나타나 자신도 모르게 울컥했기 때문이었다고 설명했다. 노래제목 ‘오빠 생각’의 오빠는 최순애보다 8살 위인 친오빠 최영주(崔泳柱)를 가리킨다. 그는 서울 배재학교를 졸업, 일본 동경으로 유학을 떠났으나 1923년 관동대지진 때 조선인대학살을 피해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는 귀국 뒤 어린이계몽단체였던 색동회 일원으로 활동하면서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애국계몽운동을 펼쳤다. 잡지 ‘어린이’에 세계명작을 번역해 싣는 등 어린이들에게 민족의식을 높이는 글들을 많이 썼다. 그래서 그는 일본 헌병의 수배자가 돼 늘 몸을 피해 다녀야하는 신세가 됐다. 노랫말에서 비단구두 사러갔다는 오빠는 어린 동생 생각이 나도 조국을 위해 항일운동을 떠나야했던 친오빠를 가리킨다. 아름답고 가슴 저미는 대목이다. 노랫말 속의 오빠는 뜸북새, 뻐꾹새 등 여름새가 울 때 떠나서 기러기와 귀뚜라미가 울어대는 가을이 와도 돌아오지 않는다. 오빠의 부재는 계절의 변화를 더 민감하게 느끼도록 만든다. 기다리는 사람이 없다면 세월의 흐름이 그토록 새삼스럽지는 않을 것이다. 오빠가 없음으로써 오히려 옆에 있을 때보다 더 풍부한 존재감을 안겨줬다는 얘기다.오빠를 기다리는 누이는 삶의 현장 곳곳에서 ‘오빠’를 보게 된다. 뜸뿍새, 뻐꾹새, 기러기, 귀뚜라미 소리들은 눈앞에 보이진 않으나 늘 마음속에 있는 오빠의 대체물들로 그들의 울음소리를 들을 때마다 얼굴이 떠오른다. 그럴수록 보고 싶은 맘이 더 간절해진다. 이 동요가 우리들 가슴을 뭉클하게 만드는 건 바로 ‘오빠’란 단어 때문이다. 오빠는 누이가 있어야 이뤄지는 개념이다. 오빠는 언제나 누이의 그리운 손위 핏줄이다. 누이란 무한한 연약함, 끝없는 보호, 한없이 정결한 그 뭣을 가리킨다. 오빠라고 불리는 순간 우리 모두는 누이를 보호하느라 진지해지고 어깨에 힘이 들어간 사춘기 소년, 순박한 소년으로 돌아간다.비단구두를 사오길 기다리는 누이는 모든 오빠들의 로망이다. 소년들은 자라서 어른이 되고 머리에 흰서리가 내리 앉은 노인이 될 것이다. 하지만 그 오빠는 영원하다. ‘오빠 생각’ 노래는 우리들의 무의식에 자리 잡고 있는 바로 그 오빠들을 불러내는 엘레지(Elegy:悲歌)다. 노래가 선을 보이자 인기는 대단했다. 어린이들은 물론 어른들까지도 애창했다. 지금도 초등학교 6학년 음악교과서에 실려 그 같은 노래의 정서가 이어져오고 있다. 노래무대는 작사자 최순애의 생가가 있었던 수원 장안문 근처다. 지금은 수원시의 한 가운데가 됐지만 동요가 만들어졌을 때만해도 대부분 논, 밭이었다. 그녀는 매일 학교가 끝나면 주변 야산에 올라가 북쪽의 서울을 바라보며 ‘비단구두를 사온다’는 약속을 하고 집을 떠난 오빠를 기다렸다고 한다. 그럼에도 그 오빠는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도피생활을 하면서 건강을 잃어 일찍 세상을 떠난 것이다. 이 노래는 집나간 오빠를 기다리듯이 민족해방의 그날을 간절히 기다리던 우리민족의 마음을 잘 대변한 노래다. 망국의 슬픔과 여러 이유들로 가족과 헤어져야했던 한겨레의 한 가닥 빛과 희망, 위안을 줬던 곡임에 틀림없다. 최순애, ‘오빠 생각’ 작사 계기로 이원수와 결혼노래의 또 다른 에피소드는 최순애가 ‘오빠 생각’ 작사를 계기로 유명 문인과 결혼에 골인했다는 점이다. 1926년 4월 경남 마산의 보통학교 졸업반이었던 15살의 이원수 학생이 ‘고향의 봄’으로 ‘어린이’ 잡지 시 코너의 주인공이 됐고 두 사람은 사랑이 싹텄다. 수원 소녀 최순애와 마산 소년 이원수(李元壽, 1911~1981년)는 잡지를 통해 서로를 발견하고 소식을 주고받은 것이다. 먼저 구애를 한 쪽은 이원수. ‘어린이’ 잡지에 실린 최순애의 동시를 보고 사랑의 편지를 보낸 것이다. 둘은 10년간 교제하다 1936년 6월 부부가 된다. ‘오빠 생각’과 ‘고향의 봄’의 만남이랄까. 하지만 아쉬움이 따랐다. 둘은 결혼 전인 1935년 처음 만나기로 했으나 이원수가 그날따라 교양과 일제저항을 위해 1929년 만든 ‘독서회’ 사건에 얽혀 일본 경찰에 붙잡혀가는 바람에 약속이 깨졌다. 이원수가 1년간 옥살이를 한 뒤에야 만날 수 있었고 그 뒤 백년가약을 맺었다. 남편인 이원수는 양산출신으로 어린 시절 마산(지금은 창원시)으로 이사가 마산상업학교를 졸업했다. 이어 1945년 서울로 올라와 경기공업학교 교사를 거쳐 출판사 편집장을 하면서 아동문화에 전념한 우리나라 대표 아동문학가로 꼽힌다. ‘고향의 봄’ 노래비가 마산 용마산에 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