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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가 남긴 그 후유증을 생각하며

  • 입력 2012.07.01 00:00
  • 기자명 emddai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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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 잭·니콜슨 주연의 영화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가 우리나라에 소개된 적이 있었다. 당시 이 영화는 미국 현지에서도 대단한 흥행을 불러 일으켰다. 우리나라에서도 큰 흥미를 끌었다. 정신질환자를 치료하는 과정에서 벌어지는 스토리였는데, 말하자면 정신병원 내 부당한 권력으로 인해 환자들이 ‘희생’ 당하고 있다는 메시지의 내용이다. 일단 환자로 ‘낙인’찍히면, 병원 내 막강한 권력에 환자들은 굴복해야 된다는 상황이 설정된다. 해서 만일 이에 반항이라도 할라치면, 환자는 전기치료실에 끌려가거나 강제압박을 감수해야된다.
주인공은 교도소보다는 정신병원이 나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정신병원이 오히려 더 폐쇄적이고 ‘병리적’인 상황이라며 투덜댄다. 심지어 어느 환자는 밖에 나가면 멀쩡한 사람일 수 있는데, 병원에 와 오히려 완전히 무력한 인간이 되었다. 작품 자체가 마치 정신병원에 악감정을 가진 사람의 한풀이 같아 보인다. 너무도 삐딱한 비유다.
그 무렵, 정신과 레지던트 4년차였던 나 역시 그 영화를 보고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인권을 중시하는 미국에서, 저런 삐딱한 인권의식을 반영한 영화를 내놓을 수 있나, 과연 정신병원이 일반사회 ‘병리화’의 주범이라는 암시의 저런 영화에 대해 그곳의 정신과 의사들은 어떤 식으로든 반발이 없었나. 이런 저런 의구심이 떠올랐다. 그러다 다시 아, 아니다. 미국이니까 저런 영화도 가능할 수 있겠다 싶었다. 정신병원을 형편없는 집단으로 매도하는 영화. 고전적인 의학적 사고방식의 틀에 젖은 나 같은 처지의 사람에겐 아무래도 이런 저런 실망감이 클 수밖에 없었다. 한데, 오랜 시간이 흐른 뒤 나는 그 영화의 여파가 실로 엄청났음을 뒤늦게 알게 됐다.
1970년대 초 미국의 정신보건체계는 큰 변화의 바람이 일기 시작했다. 소위 탈원화(脫院化, deinstitutionalization) 개념이다. 정신병 환자를 폐쇄병동에 장기간 입원시키기 보다는 될수록 병원 밖으로 내보내, 사회에 복귀시키도록 해야 된다는 생각이다. 물론 여기엔 사회 복귀로의 노력, 즉 정신재활 프로그램이 적극 개입된다. 사회 적응 훈련, 직업 재활, 가정 방문 등이 포함된 프로그램이다. 좋은 취지였다. 뿐더러 부작용이 덜 한 새로운 약물의 개발로 예전과 달리 환자들의 호전도 눈에 띄게 달라졌다. 그 덕에 단기입원치료가 가능해진 영향도 있다.
이런 조류에 힘입어 미국 사회에서는 ‘정치적으로 올바른’ 활동이 뒤따랐다. 일부 사회 엘리트들은 정신질환자들의 사회 복귀를 위한 이런 의도의 분위기를 재빠르게 눈치 챘다. 이들은 사회적 평등주의와 함께 정신과 환자들의 인권 문제에 새로이 깊은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정신질환자에 대한 ‘부당한 통제’를 정치쟁점화 시켰다는 뜻이다.
알다시피 사회의 어느 문제를 정치적으로 지나치게 범주화 시키다보면, 정신과 환자들이 갖고 있는 실제적인 현실적 문제를 잘못 왜곡시킬 가능성이 있다. 비록 영화이긴 해도, 정치 사회적 의미를 다분히 배태한,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라는 영화는 그 대표적 상징이다. 그러므로 이로 인해 미국사회의 순진한 국민 가운데, 정신병동에 대한 엄청난 왜곡 반응이 생겼던 것은 충분히 예상되는 일이었다.
미국에서도 역시 정신질환자에 대한 낙인의 역사는 오래 됐다. 환자들 대부분은 그 ‘병’에 대한 인식이 결여 돼있다. 때문에 이들 환자들은 강제성 입원이나 그 치료에 대해 강한 저항성을 가질 수밖에 없다. 더구나 의사나 병원은 ‘권위’의 상징이기도 해서, 모순된 얘기이지만, 환자는 도움 요청의 심리 이전에 자신의 자율성이나 자유의지에 반해 수동적으로 이에 굴복을 해야 한다는 것에 강한 저항이나 압박을 흔히 느끼곤 한다. 치료과정 그 자체에 이러한 잠재적 어려움이 혼재해 있는 가운데, 이 영화는 ‘인간의 자유’를 부르짖으며, 환자의 병리를 이해 못하는 사회 일반의 치료저항 의지에 더욱 불을 붙여버린 격이 됐다. 결국 이 영화는 사회에 정신병동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를 확산시키는 꼴이 되고 말았다.
미국의 정신보건시스템을 재건하려던 그 즈음에, 이 영화는 사실 적잖은 영향을 끼쳤다. 정신보건 시스템 전체에 대한 정치인의 의식에도 큰 변화가 일었다. 그 전까지 미국은 나름대로 잘 돌아가던 정신보건 시스템이었다. 탈원화(脫院化)가 하나의 이데올로기로 자리 잡으려 했다. 이런 일련의 과정에서 어느새 정신질환자는 치료보다 인권이 우선시되는 시스템이 되고 말았다. 해서 장기적인 그런 정책의 시행결과, 정신질환자들은 길거리를 방황하는 노숙자들로 넘치게 되었고, 또 병원이 아닌 감옥신세를 지는 환자들이 많아지는 형국이 되고 말았다. 사회의 범죄도 늘어만 갔다.
2000년 초. 미국 대통령 직속 정신보건회의 보고에 따르면, 당시 미국 정신보건시스템에 대해 “아수라장이다. 무능하고, 통합되어 있지 않고, 비효율적이고, 일관성이 결여돼 있다, 실망스럽고, 기능장애 상태이다.”라 했다. ‘좋은’ 정치적 신념에 의해 새로운 변화를 꾀 했건만, 현재 미국은 정신질환 치료에 매년 천억 달러 가까이 진료비를 소모시키면서도, 정신질환자의 절반 이상을 치료받지 못한 상태로 방치해두고 있다.미국의 정신 보건 시스템 정책 결정의 과정에서,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가 적지 않은 영향을 줬다는 것만을 강조하려는 게 아니다. 미국사회 역시 정책결정의 과정에선 학계의 여러 의견이 수렴되었을 거였다. 그러나 학계는 전통적으로 상아탑 속에 고립 돼 있고, 인간 삶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파악하기 어려운 한계를 안고 있다. 학계는 그런 경험부족을 보완하기 위해 흔히 통계자료를 이용하곤 하는데, 통계자료에만 근거한 어떤 정책을 결정할 경우 흔히 보다 중요한 것이 간과되기 쉽다. 특히 정신보건 관련 문제를 다룰 때에는 통계자료의 해석 외에, 환자에 대한 이해나 치료에서의 사회적 맥락, 그간 해왔던 일의 장단점 분석, 현실적으로 새로운 정책의 도입 시 생길 수 있는 부작용 같은 것 그리고 가장 중요한 ‘인간적’ 요소들을 충분히 검토해야 된다. 인권에 치중하다보면 알다시피 결국 정신질환자들은 병원보다 감옥에 가기 십상이고 범죄의 노출, 사회의 불안정, 노숙자 양상, 가족 간 스트레스의 가중 등의 문제가 뒤따를 수 있다는 점을 간과해선 안 된다.
미국의 경험을 간단히 소개한 이유는 다름 아니다. 미국의 영향을 받아 우리나라 역시 탈원화의 철학이 도입되면서 만성 정신질환자들의 관리에 대한 새로운 오리엔테이션이 생겼다. 그러나 미국에서의 연구 동향이나 의료정책을 공부한 학자들이 우리나라에서 그 응용을 탐구하려 할 때 _ 특히 정신보건 문제와 관련해선, 과연 미국에서처럼 인권의 지나친 강조로 인한 결과인 ‘인권병’에 걸린 환자들의 상황을 미리 충분히 검토했어야 했다. 정신질환자들의 인권을 폄하한다는 뜻은 전혀 없다. 다만 병식이 없는 정신병환자, 심한 알코올 중독자, 성격장애가 동반된 정신질환자 등을 다룸에 있어 미국에서 적용하는 인권의식의 잣대가 과연 우리에게도 타당한 논리인가. 미국에서도 실패한 그런 정책에 우리는 어떻게 이를 보완해 나가야 되나. 이런 방면에 대해 우리 사회에서의 논의가 부족했다는 사실이다.
요즘에 와 부쩍 늘어난 서울역 노숙자들의 대부분은 알코올 중독자를 비롯하여, 성격장애가 동반된 정신질환자들일 것이다. 이들은 재활과 치료가 적극 필요한 사람들이다. 이 뿐인가. 우리 사회는 갈수록 원자화되고 있는 가족구조다. 100만 명의 독거노인. 그들 중 상당수는 우울증을 앓고 있다. 케어가 필요한 환자들도 적지 않다. 자살률도 매우 높다. 우리의 과제는 이들을 폭넓은 케어 시스템 안으로 끌어들이도록 해야 한다. 그 외에 수십 만 명의 아이들이 학교 폭력에 시달리고 있다. 그 가해자, 피해자 가족들의 고통도 이만저만한 정도가 아니다. 관심 있는 관련 정신과 의사들의 분투도 기대가 된다. 알코올 중독은 한 해 2만 명 정도가 입원 또는 통원치료 중이다. 물론 치료를 거부하거나 치료 개념이 없는 알코올 중독자가 이보다 훨씬 더 많다고 봐야 할 것 같다. 치료를 받는 알코올 중독자가운데 태반이 재발을 반복한다. 주취 난동자의 문제는 또 어떤가. 한 해에 이들로 인한 파출소의 경제비용이 400억 원에 달한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TV를 보니 주취 난동자가 취중에 인권 운운하면서 대드니 경찰은 전전긍긍하는 태도를 보이기까지 한다. 정신과 환자 가운데 어느 정도 강제성 치료가 필요한 환자가 많은데도, 이들은 제 맘대로 병원을 들락거린다. 마땅히 입원 치료가 필요한 환자이나, 절차상 ‘잘못’ 입원 시키면, 병, 의원이나 담당 정신과 의사들은 고소당하기 일쑤다. 그 전과 달리 환자 가족의 심리적 부담이 더 커진 것만 같다. 그래서인지 요즘 정신과 의사들의 개입도 자연 수동적이 되고, 방어적 성향으로 변하고 있다. 생각건대 지금의 이런 꼴이라면 정신 보건 관련 우리의 사회적 비용도 날로 늘어날 수밖에 없을 거라 예측된다.

지역사회 복귀 프로그램의 활성화는 참으로 소중한 의미가 있다. 중요한 철학이다. 그러나 지금의 지원정책으로서는 그 효과가 얼마나 될지 의아스럽다. 정신과적 재활치료에선 자원봉사의 활용, 지역사회의 긴밀한 협조도 필요하다. 또 직업재활을 위해선 일선기업들의 협조도 마땅히 있어야 할 것이다. 결코 쉬운 일이 아닌 것이다. 장기적으로는 비용-효과를 고려하되, ‘인간적’으로 따뜻한 프로그램의 정책이 있어야 되지 않나 싶다. 우리나라의 경우 탈원화 운동의 바람이 한동안 학계에서 불긴했지만 최근 상황을 보면 정신과 병동 수가 오히려 점점 증가 추세에 있다고 한다. 보험공단의 빡빡한 지불 조건이 장기 입원을 유도케 하는지 모르겠다. 반면, 큰 규모의 정신병동을 유지하기 위해 경영자 쪽에선 장기 입원이나 다수 입원 환자를 유치하기 위한 경쟁에 쫓겨 환자 관리가 옛날 방식대로 되돌아가는 것이 아닌가, 우려도 된다. 정책 비전의 빈곤, 정신과 환자에 대한 일반의 인식 부족도 좋은 정책 개발을 저해하고, 일부에서 진행하고 있는 지역사회 복귀 프로그램 개발의 의욕을 꺾게 할 수 있다. 아, 가야 할 길이 멀고도, 멀도다.

* Scherer, R. A. 2002. "President's Commission Calls Mental health Care System 'A Maze'" Psychiatric Times 19(12)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