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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 & medicine] 그림을 통해 보는 다윗, 밧세바 사건의 재인식

  • 입력 2012.07.01 00:00
  • 기자명 emddai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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밧세바는 과연 요부이었는가?
한 나라의 통치자이며 군의 통수자인 기혼 남자가 유부녀를 탐내 그 남편인 군인을 최전방의 위험지대에 보내 죽음으로 몰아 넣은 사건이 있다. 결국 자기가 직접 손을 대서 죽인 것은 아니지만 그 남편이 없었으면 좋겠다는 살의(殺意)가 있었던 것은 쉬 알 수 있다. 이러한 것을 법률용어로는 ‘미필적 고의(未必的 故意)에 의한 살인’이라 한다. 즉 어떤 행위의 결과로서 사람이 다치고나 죽는다는 것을 인식하면서도 그런 결과가 와도 괜찮다고 묵인하는 점에 고의성이 인정되는 것이다.

[1L]젊은 나이에 이스라엘을 통일한 다윗 왕은 언변도 좋고 생기기도 미켈란젤로(Buonarroti Michelangelo 1475-1564)가 제작한 ‘다윗’(1501-04)의 조각에서 보는 바와 같이 미남형으로 잘 생긴 걸출한 인물이었다. 반면 쾌락도 즐기는 면이 있었던 것 같다.
어느 여름날 저녁 다윗 왕이 궁궐 옥상에서 바람을 쐬다가 멀리서 목욕을 하고 있는 한 여인을 보고는 그만 아름다움에 홀딱 반해 버렸다. 그는 곧 사람을 시켜 그녀에 대해서 알아보게 한바 그녀의 이름은 밧세바(Bathsheba)라는 남편이 있는 여인으로 그 남편 우리아(Uriah)는 군인으로 나가 지금은 집에 있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자 사람을 보내 그녀를 데려오게 하여 정을 통하였으며 머지않아 그녀가 임신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러한 다윗 왕과 밧세바의 만남에 대해서 밧세바를 천하의 요부(妖婦)로서 일부로 왕의 눈에 띠게 목욕을 하였다고 보는 눈과 그렇지 않고 닥쳐오는 운명에 순응한 한 숙명의 여인으로 보는 이도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문헌은 그녀를 요부로 보며 왕을 일부로 유혹한 것으로 보는 견해가 많다. 그렇다면 밧세바를 왜 요부로 보는가가 문제 된다.
요부라는 것을 거론하려면 자연히 떠오르게 하는 용어로 팜므 파탈(femme fatale)이라는 것이 있다. 이 용어는 프랑스어로 ‘여성’을 의미하는 팜므(femme)와 파탈(fatale)이라는 ‘파멸로 이끄는’ 또는 ‘숙명적’을 의미하는 용어의 합성어로 원래의 뜻은 ‘숙명적인 여인’으로 사용 되었다. 숙명적이라는 말은 피할 수 없는 필연적인 굴레를 뜻한다. 즉 팜므 파탈은 자신이 원하든 원하지 않던 그런 삶을 살아야 하는 운명을 타고난 여성인 것으로 남성을 압도하는 섬뜩한 매력적인 아름다움과 남성을 끌어당기는 흡입력을 지닌 여성을 의미하며 그녀와 함께하는 남성은 파국을 맞게 되는 것도 무릅쓰게 된다는 의미를 지닌 것이 팜므 파탈의 속성이라 한다.
그러던 것이 19세기 낭만주의 작가들에 의해 문학작품에 사용 되고난 후 미술, 연극, 영화 등 다양한 장르로 확산되어, 남성을 죽음이나 고통 등 치명적 상황으로 몰고 가는 '악녀', ‘요부’를 뜻하는 말로 확대 변용하여 사용하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밧세바의 경우는 팜므 파탈임에는 틀림이 없는데 ‘요부’로 볼 것인가 아니면 ‘숙명의 여인’으로 볼 것인가가 문제되는데 이에 대한 화가들의 의견을 그들의 작품을 통해서 보기로 한다.

밧세바를 요부로 보는 이유는 그토록 현명하고 위대했던 왕이 이성을 잃고 욕망의 포로가 되어 이성을 잃고 유부녀를 간통 하였다는 것은 좀처럼 믿기 어렵고 이에는 반드시 밧세바의 고의적인 유인이 있었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즉 밧세바가 왕이 나타나는 시간을 눈여겨보아두었다가 그 시간에 맞춰 목욕함으로써 교묘하게 남자의 욕정을 자극하여 관음욕(觀淫慾)을 유발시킨 천하의 요부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밧세바가 왕이 나타나는 시간에 맞추어 목욕을 하여 관음욕을 교묘하게 유발 하였는가를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우선 밧세바가 나체로 몸을 씻고 있던 장소가 자기의 집이거나 그 근처였을 것이다. 당시 이스라엘의 개인주택의 구조는 사방에 담을 쌓고 집 앞에는 마당이 있고 지붕은 나뭇가지를 뼈대로 점토(粘土) 약 30cm 두께로 굳어진 평탄한 지붕이었기 때문에 높은데서 보지 않으면 그 집의 안마당을 볼 수 없는 구조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당시 다윗은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오벨산 언덕위에 도성(都城)을 세우고는 이를 이름 하기를 ‘다윗의 도성(The city of David)’이라 하였으며 그 높은 전망대에서 보았다면 가능했을런지 모른다.
[2L]그런데 화가 제로메(Jean-Leon Gerome 1824-1904)가 그린 ‘밧세바(1889)’라는 작품을 보면 한 여인이 옥상에서 황홀하게 아름다운 알몸을 드러낸 채 목욕만 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남자를 유인하기 위해 춤을 추는 듯한 몸짓을 하고 있으며 멀리 떨어진 누각에서는 이 광경에 열중해 보고 있는 다윗을 그렸다. 이 정도의 몸짓이라면 과연 다윗이 욕정을 불끈 일으킬 수 있게 표현하였으며 따라서 다윗이 시종을 시켜 그 여인에 대해 알아내고는 그 여인을 궁궐로 들게 하였으리라는 것을 누구나 느끼게끔 표현한 작품이다.
[3L]사실 이 그림대로 밧세바가 옥상에 올라가 나체로 몸을 씻었다면 그것은 틀림없는 유인행각이 될 것이다. 그러나 앞서 기술한바와 같이 당시의 주택의 지붕위에서는 목욕을 할 정도가 못되는 건물이었던 것을 알 수 있으며 이 그림은 현대식 건물의 옥상이지 당시의 건물은 아니기 때문에 화가는 여인이 남성을 유인 하였다는 것을 강조하여 표현하기 위한 그림이다.
밧세바가 만일 집의 마당에 나와 몸을 씻었다면 높은 데서 내려다본다 해도 집의 담에 가려 전신은 보기 어려웠을 것이고 또 아무리 나체의 미인이라 할지라도 몸의 일부를 그것도 멀리 떨어진 곳에서 보고 한눈에 감동한다는 것은 좀처럼 생각하기 어렵다.따라서 옛 성터가 남아있던 자리에 재건하여 현재 있는 ‘다윗의 도성의 전망대’를 중심으로 볼 때 당시 주택들은 동쪽의 키드론 골짜기(Kidron valley)의 저지대에 있었다는 기록으로 보면 두 지점간의 거리는 수 백 미터 떨어졌을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당시는 망원경도 없었던 때인데 과연 다윗이 그 먼 거리의 여인을 보고 한눈에 반할 수 있을까에 의문이 생긴다(그림 3, 4, 5 참조).
[4L]
그러나 다윗은 원래 양치기 소년이었으며 양치기들은 평인으로서는 볼 수 없는 먼 곳에 있는 양을 보고 그것이 자기네 양인지를 구별할 수 있는 시력을 지니게 된다는 것이며 또 다윗은 여러 전장(戰場)을 거치면서 멀리 있는 적을 보는데 익숙한 경력이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그 가능성을 부인할 수도 없다.
그렇다면 프랑스의 화가 팡탱 라투르(Henri Fantin-Latour, 1836-1904)의 ‘밧세바(1903)’라는 작품을 보면 몸매가 아름다운 한 여인이 옷을 벗고 앉아 있다. 상황으로 보아서서는 목욕을 하고 몸을 말리고 있는 것 같으며 멀리 망루위에서는 한 남자가 이를 바라보고 있다. 여인은 자기 몸을 노출시키지 않으려고 집의 기둥과 나무 뒤에 앉아 있는 것이 제로메 화가가 그린 ‘밧세바’의 옥상에서 남자를 유인하기 위해 춤을 추는 듯한 몸짓을 한 밧세바와는 전혀 다르게 표현 하였다.
즉 제로메 화가가 그린 ‘밧세바’는 요부에 해당되며 팡탱 라투르 화가가 그린 ‘밧세바’는 ‘숙명의 여인’에 해당된다. 이 문제에 대해서 가장 중요한 열쇠는 밧세바가 그날 저녁 목욕을 하게 된 것에는 상당한 이유가 있었다. 즉 율법에 의하면 여인들은 달거리가 끝나면 몸이 부정하게 되었으니 정결례(精潔禮, 레 12:2)로 몸을 씻어야 했다. 실은 밧세바는 생리를 막 마쳤기 때문에 정결례로써의 목욕을 했던 것이며 단순히 몸을 깨끗하게 하거나 왕을 유혹하기 위해서 목욕을 했던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밧세바를 요부로 보는 데는 모순이 개입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