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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선 잘하그래이(성철 스님 열반 20주기 추모 에세이)

  • 입력 2013.11.26 00:00
  • 기자명 emddai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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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도서명 : 참선 잘하그래이(성철 스님 열반 20주기 추모 에세이)
2. 저자 : 김형효  한승원 외
3. 정가 : 15000원
4. 출간일 : 2013년 11월 26일
5. ISBN : 978-89-349-6561-9 03220
6. 쪽수 : 392쪽
7. 판형 : 145*220mm
8. 분류 : 국내도서 > 종교 > 불교 > 불교 인물 
9. 책 소개-10년 동구불출洞口不出, 8년 장좌불와長座不臥, 삼천 배의 만남,
열반 20주기, 성철 큰스님의 청빈과 수행의 삶이 다시 살아온다!
성철 스님 떠나신 지 20년. 암자를 막고 동구불출과 장좌불와로 수행의 최고경지를 이룬 불교계의 큰산맥 성철 큰스님. 학계, 종교계, 문화계의 중진 및 원로들이 인연을 따라 오늘에 되살린 성철 큰스님의 깊은 발자취.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 ‘자신을 바로 봅시다’ 등 큰스님의 가르침 속에서 인생의 의미를 궁구하며 살아온 스물일곱 저자의 글 속에서 성철 스님을 만난다. 

 
한 편의 소설처럼 성철 스님의 정신을 추억하는 소설가 한승원의 글은 마음을 서늘하게 하고, 속세의 삶의 소중함을 이야기하는 이계진의 목소리를 적막하다. 한겨울 성철 스님의 다비식에서 길어올린 시인 정호승의 마음은 따뜻하게 다가온다. 큰스님과의 인연의 깊고 얕음을 떠나 성철 스님께서 우리에게 어떤 의미였는지, 사람들 가슴에 어떤 화두로 남으셨는지 다시금 생각한다. 

 
10. 책 속에서
삼천 번의 절은 꼬박 하루 동안 해야 하는데, 그 절을 하는 동안에 바보가 아닌 한에는 성철 스님을 만나뵙고 풀어야겠다고 마음먹었던 고가 모두 스스로 풀릴 터이다. 그게 풀렸다면 스님을 뵈어야 하는 이유가 소멸되는 것 아닌가.
-27쪽(한승원 <성철 스님과 삼천 배는 나에게 하나의 화두였다>)

 
성철 큰스님은 한평생 바루 하나와 옷 한 벌로만 자신의 몸을 건사하셨다. 그리고 나이 일흔이 될 때까지도 손수 양말을 기워 신었으며, 한겨울이라도 땔감의 양을 결코 지나치게 하는 일이 없었다고 한다. 화장지 한 장도 네 조각으로 나누어 사용하고, 승복이 누더기가 될 때까지 평생 옷 한 벌로 지내신 것은 결코 청빈에 관한 가르침만은 아닐 것이다. 구도자로서 물질에 대한 절제의 태도와 외향적인 모습에 마음을 두지 말고 내적인 수련에 더욱 정진하라는 가르침이 아닐까 생각한다.
-41쪽(김희중 <성철 큰스님의 청빈과 수행의 삶을 바라보며>)

 
우리 현대사에서도 박정희 쿠데타 이후 신군부의 노태우정권까지 삼십일 년 동안은 무신정권이라 할 만하다. 지눌선사는 정혜결사를, 성철 스님은 봉암사결사를 주도했다. 정혜결사와 봉암사결사는 수사만 다를 뿐 내용은 똑같다. “부처님 법대로 살자.”두 스님은 변방에 머물며 서울에 나타나지 않았다. 성철 스님 또한 불법으로 나태한 한국불교를 찔렀다. 수행으로 자신을 일으켰다. 지눌의 ‘땅에서 쓰러진 자 땅을 짚고 일어서라’는 성철의 외침이기도 했다. 그것은 자신을 향한 채찍이었다. 성철 스님은 산중에 물러나 있으면서 세상에 가장 깊숙이 나아가고 있었다. 불교의 면목은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물러서는 것이었으니 제자리를 지켜 현실과 불교계를 깨웠던 것이다.
-89~90쪽(김택근 <나 같은 중한테 속지 마라>)

 
밤이 깊어가자 늦가을 산속은 갑자기 겨울이 찾아온 듯 무척 추웠습니다.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하나둘 불길 곁으로 모여들었습니다. 저도 너무나 추워서 점점 불길 곁으로 가까이 다가갔습니다. 그러다가 문득 깨닫게 되었습니다. ‘아! 지금 이 불길이 무엇인가. 바로 스님의 법체를 태우는 불길이 아닌가. 스님께서는 자신의 몸을 태워서 나를 추위에 떨지 않게 해주시는구나’ 하고 깨닫게 되었습니다.
-227~228쪽(정호승 <시를 쓰려면 천 번을 써라!>)

 
성철 스님은 그런 보조지눌 국사를 엄청 비난했다. 그 유명한 돈점 논쟁은 그중에 일부분에 불과했다. 그 논쟁은 육백 년 만에 일어난 제대로 된 교리논쟁이기도 했다. 한두 번도 아니고 법상에 올라갈 때마다 반복해서 집요하게 이야기했다. 심지어 보조 스님 때문에 “조계종 법맥마저 유야무야되었다”는 극언도 서슴치 않았던 것이다. 그 바람에 그날은 법회 분위기까지 싸늘해졌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역으로 성철 스님이 혹여 보조 스님의 화신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던 적도 있었다. 보조의 오류가 아니라 당신의 오류였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다면 보조의 오류를 바로 잡으려고 저렇게까지 집요하게 해야 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보조 스님의 후신이 아니라면 어떻게 저리도 자신있게 또 모질게 비판할 수 있었겠는가?
-286쪽(무비 <백일법문을 듣는 일이 일상사였다>)

 
11. 성철 스님 소개
성철 스님1912-1993
성철 스님의 속명은 영주(英柱)이고 법호는 퇴옹(退翁), 법명은 성철(性徹)이다. 1912년 음력 2월 19일, 경남 산청군 단성면 묵곡리에서 부친 이상언과 모친 강상봉 사이에서 태어났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서당에서 자치통감(資治通鑑)까지 배운 뒤로는 더 이상 다른 사람에게 배우지 않고도 스스로 학문의 깊은 이치를 깨달았다.

 
늘 ‘영원에서 영원으로(From Eternity to Eternity)’라는 인생의 궁극적인 문제에 관심을 갖고 철학, 의학, 문학 등 동서고금의 책을 두루 섭렵하였으나 그 해결점을 찾지 못했다. 어느 날 한 노스님이 건네준 영가대사의 증도가(證道歌)를 읽고 캄캄한 밤중에 밝은 횃불을 만난 것처럼 홀연히 심안(心眼)이 밝아짐을 깨달았다. 그 길로 지리산 대원사로 가서 서장(書狀)을 읽고 ‘개에게는 불성(佛性)이 없다’는 무(無) 자 화두를 들고 불철주야로 정진하였다. 정진 40일 만에 화두가 동정일여(動靜一如)에 이르게 되었다.

 
1936년 봄, 가야산 해인사로 출가하여 백련암에 주석하고 있던 하동산(河東山) 스님을 은사로 수계득도(受戒得度)하고, 이듬해 봄 범어사에서 운봉(雲峰) 스님으로부터 비구계를 받았다. 

 
1947년 문경 봉암사에서 “부처님 법답게 살자”는 기치를 내걸고 공주규약(共住規約)을 만들어 봉암사결사를 추진하였다. 이 결사는 한국불교의 종풍을 바로 세우고 옛 총림의 법도를 되살리는 일로서, 오늘날 한국조계종의 형식과 질서가 모두 여기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러나 한국전쟁으로 결실을 맺지 못하고, 통영 안정사 골짜기에 초가삼간 토굴을 짓고 천제굴(闡提窟)이라고 이름하고 머물렀다. 스님의 명성을 듣고 찾아오는 신도들에게 처음으로 삼천 배를 시키고, 누구든 스스로 기도하고, 참회하고, 그 공덕은 남에게 베풀라고 가르쳤다.

 
1955년 해인사 초대 주지에 임명되었으나 거절하고, 대구 팔공산 성전암으로 들어가 철망을 두르고 절문 밖을 일절 나오지 않았다. ‘성철불교’라고 하는 독보적인 불교이론과 실천논리가 이때에 확립되었다. 10여 년 동구불출을 마치고 1965년 김용사에서 최초의 대중법문을 하였다.

 
1967년 해인총림 초대방장에 취임하고, 그해 겨울 해인사 대적광전에서 사부대중을 위해 하루에 두 시간씩 법문을 하니, 이것이 그 유명한 ‘백일법문(百日法門)’이다. 백일법문은 불교의 근본 진리가 선과 교를 통해서 중도(中道)에 있음을 밝히고 선종의 정통 종지는 돈오돈수임을 천명하고 현대 물리학 이론을 통해 불생불멸의 진리를 밝히는 대법석이었다. 18년 동안 해인총림의 방장으로 퇴설당과 백련암에 머무르며 서릿발 같은 선풍(禪風)의 기강을 드높여 가야산 호랑이로 불렸다. 1981년 1월 대한불교 조계종 종정에 추대되어 한국불교의 정신적인 지주로서 종단의 안정을 가져왔다.

 
1993년 11월 4일 새벽, 삭발득도하고 성철이라는 법명을 받은 해인사 퇴설당에서 “참선 잘하라”는 한 말씀을 마지막으로 남기고 열반에 들었다. 세수 82세, 법랍 58년이었다.

 
12. 저자 소개
김형효_서강대학교 교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대학원장.
한승원_소설가. 소설 《아제아제 바라아제》의 작가.
김희중_천주교 대주교. 광주대교구장.
이은윤_전 <중앙일보> 논설위원, 전 <금강불교신문> 사장.
이계진_방송인, 전 국회의원.
김택근_언론인, 시인.
이호신_한국화가.
고영섭_종교학자.
문태준_시인, 불교방송 프로듀서.
박성배_뉴욕주립대학교 불교학 교수.
남지심_소설가. 소설 《우담바라》의 작가. 
정종섭_헌법학자. 전 서울대학교 법학대학장.
박제천_시인. 경기대학교 문학창작과 교수.
홍신선_시인. 전 동국대학교 문예창작과 교수.
정호승_시인.
고형렬_시인.
박정진_문학평론가. 문화인류학자.
김호성_동국대학교 불교학부 교수.
무비_스님. 동국대학교 역경원장.
김성동_소설가. 소설 《만다라》의 작가.
고준환_법학박사. 경기대학교 명예교수.
송준영_시인.
강대철_조각가.
박석_상명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
최태만_미술평론가. 국민대학교 예술대학 교수.
황순일_불교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