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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묘화가의 삶과 그 작품의 특성

  • 입력 2016.07.18 16:49
  • 기자명 문국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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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화가 루이스 웨인(Louis Wain, 1860~1939)은 영국 동부의 클라켄웬(Clerkenwell)에서 1남 6녀 중 맏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어릴 적부터 음악, 미술 등 예술에 많은 관심과 재능이 있었는데 이러한 그의 예술적인 재능은 터키카펫 디자이너였던 그의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것으로 보인다. 루이스 웨인이 원래는 음악가가 되려고 웨스트런던 예술학교에 입학 하였으나 그가 20세 되던 해 그의 아버지가 돌아가셨기 때문에 가족들을 돌보기 위해 음악가의 꿈을 포기하고 가장으로서 어머니와 다섯 동생을 부양해야 했는데 동생들은 평생 결혼하지 않고 그에게 의존했다.

그는 23세 되던 해에 그의 막내 여동생의 가정교사 에밀리 리처드슨과 결혼을 한다. 충격적인 것은 에밀리는 웨인보다 10년 연상이어서 당시에도 주변의 입방아를 피할 수 없었다고 한다. 결혼 후 그는 피터(peter)라는 이름의 고양이를 키웠는데 그 고양이는 루이스 웨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러나 결혼 한지 몇 달 만에 그의 아내 에밀리가 유방암에 걸렸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며, 그는 아내를 간호하면서 그녀를 기쁘게 하기 위해 기르던 고양이 피터의 그림을 무수히 그리면서 간호했다. 그러자 아내는 그림을 잡지나 신문사에 보낼 것을 권유해 화가는 코믹한 고양이 그림과 만화를 주요 일간지와 잡지사에 보내 점차 알려지게 되자 계속 고양이 그림을 그리며 꾸준히 활동하였다. 에밀리는 그렇게 노력하는 그를 격려하여 수많은 작품들을 탄생시켜 결과적으로 남편이 ‘고양이를 사랑하는 애묘(愛猫)화가’로서 출세하는데 내공을 쌓았던 것이다.

화가들은 자기의 상상에서 어떤 소재의 대상이 떠오르면 이에 몰두하여 그로부터 주된 영감을 얻곤 한다. 그 예로 클로드 모네(1840~1926)는 정원 연못의 수련에 매혹되어 이에 열중하였으며, 폴 고갱(1848~1903)은 남태평양 폴리네시아의 이국적 아름다움에 정열을 쏟았고, 빈센트 반 고흐(1853~90)는 강렬한 색채를 품은 아를의 해바라기에 매혹 되였던 것과 같이 루이스 웨인은 고양이에 미치다 시피 하여 평생을 고양이만을 그리는 화가가 되었는데 그 배경에는 아내 에밀리가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행복도 잠시 결혼한 지 3년 만에 에밀리가 세상을 떠나게 된다. 그러자 루이스 웨인은 집으로 돌아와 가족들과 지내게 된다. 당시 영국에서는 쥐를 잡기 위해 집집마다 고양이를 널리 키우고 있었고 고양이에 대한 대중적인 관심이 시작되는 시기로서 최초의 캣 쇼가 1871년 영국 런던의 크리스털 궁전에서 열렸고, 이어 1887년에는 내셔널 캣 클럽이 창설되었다.

이러한 때에 맞추어 화가는 의인화한 고양이 그림을 그렸는데 그가 그린 고양이들은 사람들처럼 차려입고 식사를 하고, 담배를 피우고, 카드놀이를 하고, 오페라를 보고, 테니스와 골프와 축구를 즐기는 장면을 익살과 유머로 가득한 그림을 그려 영국에서는 남녀노소 누구나 좋아하는 ‘국민화가’급 인기를 누리게 되었던 것이다.

그의 의인화된 고양이 그림은 빅토리아 시대 말부터 제1차 세계대전 발발때까지, 즉 1880년대 중반부터 1910년대 중반까지 전성기를 맞아 그는 1년에 약 600점에 이르는 고양이 그림을 그렸고 최소 11종의 책에 삽화를 그렸으며, 그가 그린 1천100종의 그림엽서는 수백만 세트씩 제작돼 유럽과 영어권 국가에서 팔렸다고 하니 그 인기를 짐작할 수 있는데 그는 그야말로 그림을 많이 그리는 또 그리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는 다작증(多作症)에 속하는 소위 하이퍼그라피아(hypergraphia)에 속하는 화가이었던 것이 틀림없다.

지금에 와서 20세기에 동물을 의인화한 애니메이션과 그 주인공들의 캐릭터들을 보면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되는 것은 디즈니 작품의 ‘미키마우스’나 ‘톰과 제리’ 등과 같은 그림에 익숙해졌기 때문인데, 이러한 그림들보다 최소한 한 세대 이상 앞서 루이스 웨인은 동물의 의인화그림의 스타일과 설정들을 왕성하여 구현했으며 또 그는 아동 층에 머물렀던 동물그림의 독자층을 성인층으로 넓힌 선구적인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19세기만 해도 영국에서 고양이가 반려동물로서 호감을 주는 대상은 아니었다. 하지만 1900년을 전후해 고양이를 배척하는 풍토가 사라지고 애묘문화(愛猫文化)가 붐을 이루게 되었는데 그렇게 되는 이면에는 루이스 웨인이 기여한 바도 적지 않았다.

평생 동물그림을 그린 데서 알 수 있듯이 그는 동물애호가였다. 그는 고양이를 포함해 보통 열 마리가 넘는 반려동물들과 함께 지냈으며 고양이 화가로 스타덤에 오른 뒤에는 유명인사로서 동물의 권익을 위해 기꺼이 앞장서기도 했다. 즉 개에게 의무적으로 입마개를 씌우는 것에 반대하는 법안을 제정하는 운동에 열심히 참여한 것을 비롯해 여러 동물보호 단체에서 위원으로서 활발한 활동을 했으며, 국제고양이클럽의 2대 회장(1891~96년)과 위원장(1896~1911년)직을 역임하기도 했다.

그는 국가적으로 사랑받는 캣 아티스트가 되었으며 그러자 그는 미국으로 건너가 몇 년 간 머무르면서 아메리칸 캣 팬시를 통해 미국에서도 유명해진다. 1900년대 초 영국 우체국은 한쪽에 그림이 그려진 엽서의 발송을 최초로 허용하는 등의 행운이 따르기도 했다.

엽서판매는 1904년부터 1910년 사이 피크를 이루었고, 루이스 웨인은 엽서에 실을 그림을 그려달라는 요청으로 눈 코 뜰 새 없이 바쁜 날들을 보냈으며, 그의 고양이들은 신문, 카드, 엽서, 어린이 동화책에 실렸다. 그러나 캣 아티스트로서의 명성에도 불구하고 그는 항상 돈이 쪼들리는 삶을 살아야만 했다. 그는 종종 자신의 작품을 헐값에 팔았고 저작권도 획득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의 그림은 무단으로 복제되어 판매되었고 결국 그는 항상 빚에 쪼들리게 된 것이다.

1914년에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대중의 관심은 그에게서 멀어져갔다. 웨인은 거리에서 버스에 치여 몇 달 동안 병원 신세를 져야 했고, 늘어나는 빚에 그의 여동생들은 그가 그린 작품들을 팔아서 생활을 연명했다. 전쟁으로 인한 불황으로 그의 후기작품들은 타격을 입고 그는 생활고에 시달렸다.

그러다가 1917년 57세의 나이에 그는 정신이상이 생겨 결국 1924년에는 정신분열 증세로 국립정신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는데, 거기서 그는 책을 저술했고 자신의 후기작품을 담은 화집도 출간했다. 고양이를 사랑해서 고양이 이외의 다른 걸 그리지 않기로 결심했던 그는 말년을 병원에서 고양이를 그리며 보내다 결국 1939년 79번째 생일을 앞두고 사망하고 만다.

이렇게 그는 만년의 15년간을 정신병원에서 보냈는데, 병원에서의 그는 피해망상에 계속 괴로움을 받으면서도 그는 그림에서 손을 떼지 않았는데, 그리는 것은 고양이뿐이었다. 이 시기에 그린 그림들 중 강렬한 색채와 복잡한 패턴을 담은 추상화된 고양이 그림들은 심리상태의 변화가 그림에 나타나는 사례로 훗날 심리학 교재에 실리기도 했다.

1924년 정신분열증 진단을 받고 스프링필드 정신병원 극빈자 병동에 수용된 지 약 1년 만에 세상에 알려지게 되자 총리 램지 맥도널드와 ‘타임머신’의 저자 허버트 조지 웰스까지 나서 루이스 웨인을 도와, 왕립 베들렘 병원 개인병실로 옮겨져 보다 나은 환경에서 지내게 되었다고 한다.

필자는 이처럼 그림에서 드러나는 화가의 정신세계, 병의 증상이 달라짐에 따르는 그림의 특징 등을 알고 싶어 실제로 유명한 화가들 중 정신병이나 우울증을 앓은 화가들 중 하이퍼그라피아에 걸린 화가의 그림에 흥미를 느껴 루이스 웨인의 그림들을 보기 시작했으며 그 작품 중에 특이한 점 즉 최후에는 통일성을 완전히 잃어버린 작품도 있다. 그러나 바로크 풍의 세밀한 데생은 초기의 사실적인 그림보다 훨씬 더 독창적인 것도 있다.

우선은 초기 작품 중에 의인화된 고양이들이 그림엽서에 그려졌던 것들 중에서 그야말로 표현이 잘된 그림 5점을 소개하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