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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인화 그림으로 고양이의 권익 외친 묘권화가

  • 입력 2016.10.24 15:03
  • 기자명 문국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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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고양이 화가 루이스 웨인(Louis Wain, 1860-1939)이 살던 19세기만 해도 영국에서 고양이는 그리 호감이 가는 반려동물의 대상이 아니었다. 그러나 루이스 웨인은 고양이를 사랑하는 애묘가(愛猫家)로서 1886년 ‘새끼고양이들의 크리스마스 파티’라는 그림을 기점으로 스타덤에 올랐다. 그러나 이에 만족하지 않고 어떻게 해서든지 사람들에게 고양이는 1만 년 전부터 사람들과 같이 살아온 사랑스러운 반려동물이라는 인식을 되살려야 갰다는 생각에서 시작한 것이 고양이를 의인화해서 사람처럼 행동하는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였다. 즉 고양이는 반려동물로서의 권익, 즉 묘권(猫權)을 찾아주어야겠다는 판단아래 사람처럼 행동하는 고양이 그림을 열심히 그린 묘권 옹호화가 이기도하다.

즉 그는 책을 위시해 엽서, 잡지, 포장지, 달력과 심지어는 장난감에 이르기까지 인쇄 가능한 거의 모든 물건에 자기가 그린 고양이 그림을 사용하게끔 흥미진진한 도안을 마련하고 그의 고양이는 서서 걷는 것을 시작으로 사람들처럼 멋진 스타일의 세련된 현대식인 옷을 착용하게 되었다. 이렇게 의인화된 그의 고양이들은 사람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풍부한 얼굴 표정으로 희열과 분노도 표시하고, 재미있는 행동을 하는 장면, 즉 차를 마시며, 담배도 피우고, 악기를 연주하고, 오페라를 관람하며, 카드 놀이와 낚시도 즐기는 등 사회생활을 통해 인간관계의 진실적인 면과 그리고 그 이면의 풍자적인 요소를 표현함으로 사람들의 이목을 사로잡았는데 그러했던 그의 그림들을 보기로 한다. 루이스 웨인이 한 잡지의 투고한 삽화 중에 ‘시중에서 물건 사는 시각(時刻)’이라는 그림을 보면, 런던 시내의 한곳에서 물건을 사고파는 장면인데, 그림의 가운데에는 여러 옷차림으로 의인화된 숙녀로서의 암고양이들이 줄을 지어 서있고 그 맨 앞에는 한 남자 고양이는 손을 쳐들고 무언가를 이야기하는데 아마도 백화점의 세일을 위해 많은 고양이가 모이니까 질서 있게 입장시키기 위한 것을 표현한 것 같다. 그림에서 그 행렬로부터 앞쪽은 일반적인 행상들의 광경으로 맨 좌측에는 스택을 든 신사에게 꽃을 사라고 권하고 있으며, 그 바로 옆에서는 한 신사의 구두를 닦아주는 구두닦이가 있고, 신문팔이와 애들에게 먹을 것을 팔기 위한 장난감 놀이로 유인하는 행상 고양이도 있다.
이랬듯이 런던 중심가에는 질서를 지키는 선한 시민고양이들만 있는 것이 아니라 한 숙녀 모자를 쓴 여인고양이와 남편인 듯한 신사고양이가 갑자기 성난 얼굴표정으로 크게 소리 지르면서 뛰어가는 무질서한 행동을 하고 그 바로 뒤에는 자전거를 탄 젊은 고양이가 뒤따르는 바람에 한 쌍의 신사숙녀 고양이는 깜작 놀라 뒤로 물러나 두 고양이를 갈라놓아 당황하는 표정이다.

이렇듯 선량한 런던시민의 질서 있는 생활을 하는 반면에는 밖으로는 신사숙녀 차림을 하였지만 남을 생각지 않고 자기네의 일이라면 남에게 폐를 끼치면서도 서슴지 않고 행동하는 시민도 있음을 꼬집고 있다. 또 ‘고양이 나라의 무서운 자동차 사고’라는 삽화를 보면 우선 영국에 자동차가 보급되기 시작한 것은 20세기 초이며 초창기답게 차사고가 많았기 때문에 화가는 이를 화제로 삼았다고 한다. 고양이들은 워낙 높은 곳을 좋아하기 때문에 화가는 고양이들의 차전용도로는 마치 지금의 고속도로모양으로 높은 것에 로프웨이를 만들어 이를 사용하는 것으로 표현하였으며 또 사고도 많기 때문에 교통경찰이 곤봉을 들고 이를 감시하고 있다. 그렇지만 한 고양이의 차는 로프웨이에서 바퀴가 빠지면서 남의 집의 세탁하고 있는 물통에 곤두박질치고 있다. 이를 보고 있던 청년고양이는 화가 난 표정으로 “아무리 과학이 발달 되여 새로운 고통수단을 만들었다고는 하지만 과학의 모순은 사고를 동반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아야 할 것임을 강조하는 것 같다. 루이스 화가가 이러한 풍자적인 그림을 내놓으면서 잡지기자와의 대화에서 한 말을 보면 <나는 지금까지 여러 가지 모양과 크기의 고양이를 7만 마리나 그려왔는데 그 고양이들을 이용해 사람들의 여러 가지 악습이나 결점만이 아니라 그 정열과 즐거움을 정치 이외의 모든 면에서 일어나는 것을 참고하여 그려왔으며 그 목적하는 교훈을 반드시 표현하려 노력하였다. 그림으로의 표현이 불가능할 경우에는 이야기를 장식하기 위해 그 속의 결함을 과장하고 특징을 강조하였으며 어떤 것은 제목으로 성의를 다해 표현해 보았다.>라고 한 것을 볼 때 그의 고양이들은 풍자적인 동시에 기록으로 그 당시의 사회상을 전해주는 역할도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루이스 웨인의 명성은 날로 높아져 1900년 초에는 정점에 달해 그림책의 삽화만이 아니라 그의 그림이 주역이 된 나름대로의 책이 나오게 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루이스 웨인 연감(年鑑, Louis Wain’s Annual)’이다. 이 연감 중에서 재미있게 표현한 그의 그림 몇 점을 추려보기로 한다. 연감의 그림 중에서 흥미 있는 것으로는 ‘우리 이제는 쥐를 먹지 않고, 애완동물로 하고 있다.’라는 그림이 있다. 커다란 나비타이를 하고 장식이 달린 모자를 쓴 숙녀고양이가 양산을 들고 네 마라의 쥐를 줄로 묶어 쥐고 산책 나온 그림이다. 화가가 이렇게 고양이가 쥐 사냥을 하지 않게 된 것은 이제는 고양이가 귀염을 받는 반려동물로 각 가장에서 자리 잡고 있어 이제는 쥐를 잡아먹지 않아도 식량걱정은 없다는 배경이 있기 때문에 나온 그림이다. 그리고 이 그림과 관련이 있다고 보여지는 그의 작품 ‘우리가 곧 받게 될 것을 위하여’라는 석판화는 한 가족인 듯한 8마리의 고양이가 식탁 앞에 앉아있으며 가장인 듯한 고양이 앞에는 검은 오라기 같은 것이 나와 있는 요리 한 접시가 있으며 그 옆에는 이를 덜어먹을 빈 접시가 석장이, 그리고 이 요리와 접시의 좌우에는 스푼 하나씩이 놓여있다. 그림의 좌측에는 어린고양이 세 마리가 있으며 그들 앞에는 작은 벌레가 있는데 한 마리는 기어 나가려하니 작은 고양이가 이를 잡으려하고 다소 큰 고양이는 이를 보지 않으려고 눈을 가리고 있다.

고양이들 앞에 놓여있는 검은 오라기가 달린 요리는 생쥐를 잡아 만든 요리로서 쥐의 꼬리가 나온 것으로 그전 같으면 이 요리를 가족들이 나누어 맛있게 먹을 것인데 이제는 쥐를 먹지 않고 애완동물로 기른다는 것을 암시하며, 어린 고양이들 앞에 있는 작은 벌레도 이제는 잡아먹지 않은 것으로 되어 있는데 철없는 작은 고양이는 벌레가 도망치려하자 본능적으로 이를 잡으려하고 있다. 그림 제목이 ‘우리가 곧 받게 될 것을 위하여’라는 의미는 자기네들이 곧 받게 될 먹을거리를 위해 지금까지 먹어온 쥐나 날벌레를 이제는 먹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그렇다면 그 답이 될 수 있는 그림을 보기로 한다. 루이스 웨인의 ‘차를 대접하는 웨이터’라는 그림을 보면 가정집 식당에서 중년교양이가 자식인 듯한 고양이와 함께 식사를 하는데 사람들과 똑같이 접시에는 생선요리가 담겨있고 이를 나이프와 포크를 써서 먹고 있으며 그 옆에는 하녀가 빈 접시를 들고 서있다. 또 그림의 좌측에는 웨이터가 식사가 끝나면 대접할 차를 준비하고 있는 광경을 표현하였다. 루이스 웨인의 의인화된 고양이들은 주식이었던 쥐나 벌레를 먹지 않고 사람들처럼 식당에서 하녀와 웨이터의 서브를 받으면서 가족과 함께 잘 요리된 생선요리를 먹고 있는 것으로 표현한 것이다. 화가는 이렇게 사람들이 하는 문화생활을 고양이들도 꼭 같이 한다는 것으로 표현한 것은 각 가정에서 반려동물로 같이 생활하는 고양이는 가족의 일원으로 대우하여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며 고양이들이 가족의 일원으로 대접 받을 때 비로소 고양이의 권리는 보장받게 된다는 묘권화가 다운 표현을 한 것이다.